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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군 생극면 소재 "큰바위얼굴 조각공원"의 전시작품 중에서 오늘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을 소개합니다.

유관순은 꽃다운 나이(18세)에 목숨을 바쳤으며,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옥사하였습니다. 매헌 윤봉길은 상해에서 개최된 일제의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한 인물입니다.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우리나라가 자주 독립국임을 외치다가 순국하였습니다.

뉴스를 보면 마침 안중근 의사의 뤼순감옥 순국 98주년을 맞아 유해발굴조사단을 구성하여 중국 현지로 파견, 본격 활동한다는 소식입니다. 안 의사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번에는 그 유언이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애국지사(독립운동가)들은 우리가 역사공부를 하면서 한 번쯤은 들어본 인물입니다. 이 글이 우리의 선열들을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無順). 


(1) 김 구(1876-1949) 
일제침략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 해방 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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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관순(1902-1920) 
이화학당(梨花學堂) 재학 당시 3·1운동이 일어나자 아오내[竝川] 장터 시위를 주동하고 수감된 뒤에도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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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중근(1879-1910) 
1907년 이전에는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벌였고, 그 뒤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초대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하얼빈에서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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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영환(1861-1905)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자결로 일제에 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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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 준(1859-1907)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를 계기로 일제의 침략을 폭로·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글을 작성하여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언론기관을 통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킴. 그러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회의 참석의 길이 막히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순국(殉國)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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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손병희(1862-1922)
천도교 지도자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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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윤봉길(1908-1932) 
상하이[上海]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爆殺)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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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최익현(1833-1906)
대원군의 대내정책을 비판한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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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마리아(1891-1944)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 참가함.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됨. 이 때 받은 고문으로 끝내 병사.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독립기념관에 세워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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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안창호(1878-1938) 
흥사단을 창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1930년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가 5년 간 옥살이. 호는 도산(島山).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이 호를 따서 이름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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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봉창(1900-1932) 
1932년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몬(櫻田門)에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검거되어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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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안희제(1885-1943) 
독립운동가·민족기업가·교육자·언론인. 국권회복을 위해 정신적·경제적 자강(自强)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육과 민족기업 육성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언론·종교운동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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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노백린(1875-1926)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14년에 하와이에 건너가 국민 군단(國民軍團)을 창설 3·1 운동 때 상하이 임시 정부에 가담하여 군무총장을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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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조만식(1882-1950)
호는 고당(古堂). 3·1 운동에 참가하였고, 1922년에 조선 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치는 등 민족 운동 및 기독교계의 중진으로 항일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 8·15 광복 후에는 평양에서 조선 민주당을 조직하여 민족 통일 운동에 힘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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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승훈(1864-1930)
호는 남강(南岡). 1907년에 오산 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과 애국사상을 고취하였고 1919년 3·1 독립 선언에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가 투옥됨. 뒤에 조선 교육협회 간부와 동아일보 사장을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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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조병옥(1894-1960) 
호는 유석(維石). 광주 학생항일운동과 수양 동지회(修養同志會) 사건 따위로 옥고를 치름. 광복 후 한국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며,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공천을 받았으나 신병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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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동녕(1869-1940) 
《제국신문》의 논문 위원을 지냈으며 국권 강탈 후에 서간도 학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과 교포(僑胞)교육에 힘씀. 1919년 상하이 임시 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탄생을 주선하였으며 국무총리를 역임.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 광복 진선(韓國光復陣線) 결성에 참가하여 항일전에 앞장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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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김동삼(1878-1937) 
국권이 강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8년 김좌진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 등을 지냄. 재 만주 동포의 권익신장에 힘썼으며, 1931년 만주 사변 때 체포되어 옥사(獄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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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김창숙(1879-1962) 
호는 심산(心山). 임시 정부 의정원 부의장을 지냄. 광복 후에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였으며, 부정 선거를 규탄. 성균관 대학교를 창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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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박은식(1859-1925) 
호는 백암(白巖)·겸곡(謙谷). 상하이(上海)에서 《독립신문》《한족 회보》《사민보(四民報)》 등의 주필로 독립사상을 고취. 저서에 《한국 통사》, 《한국 독립운동지혈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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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남궁익(1863-1939)
《황성신문》 사장을 지냈으며 교육과 민족 문화 사업에 힘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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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재필(1864-1951) 
호는 송재(松齋). 김옥균 등과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 생활. 후에 귀국하여 독립 협회를 조직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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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조봉암(1898-1959)  
호는 죽산(竹山).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여 복역하였고, 1925년 조선 공산당에 참여하였으나 광복 후 공산당을 탈당. 1952년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낙선하였으며,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정치 활동을 벌이다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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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이종일(1858-1925) 
호는 옥파(沃坡)·묵암(默菴). 3·1 독립선언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제국신문》 사장으로 있을 때 필화로 투옥되었으며, 후에 천도교 문화 운동에 종사. 조선 국문 연구회 회장이 되어 한글 맞춤법 연구에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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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김상옥(1890-1923) 
1920년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 자금을 모금. 1923년에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격전 끝에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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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상설(1870-1917) 
호는 부재(溥齋). 1894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의정부 참찬을 지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고, 1907년에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헤이그에서 열리는 평화 회의에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참석할 자격을 얻지 못하여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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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신익희(1894-1956) 
호는 해공(海公). 임시정부의 외무부장, 내무부장을 지냈고, 8·15 광복 후에는 제헌 국회 의장, 제2대 국회 의장에 당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거 유세 중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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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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