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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마을에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국난을 이겨내는데 큰공을 세운 인물인 매헌 정기룡 장군을 기리는 유허지가 있는데, 사당의 이름은 경충사(景忠祀)입니다.



 

정기룡(1562∼1622) 장군은 곤양 정씨의 시조로 원래 이름은 경운이였으나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에 의거 이름을 기룡으로 고쳤습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의 벼슬로 거창싸움에서 왜적 500여 명을 격파하고, 곤양의 성을 지키는 장이 되어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또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이 되어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지요.

장군은 경상도방어사와 김해부사·밀양부사·울산부사 등을 거쳐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승진하고 56세인 1617년(광해군 9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활약하다가 16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사 진중에서 순직했습니다. 장군의 묘는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있습니다.

그는 사후에 상주의 충렬사에 모셔졌고, 시호는 "충의"입니다. 장군의 유품은 진양 정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오다가 1989년 경상남도 하동의 경충사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 전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교서, 장검, 임금이 벼슬을 내릴 때 발급하는 명령서인 유서 등입니다. 

위키백과사전에 의하면 인터넷이나 소설매체에서 이순신에 버금가는 명장으로 다뤘던 적이 있으나 이는 대부분 공식적인 사서가 아닌 가문 행장록에 근거한 것으로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싸운 공로는 있지만 대부분 소규모의 전투였으며 그나마 큰 전투였던 사천왜성 전투에선 대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당대의 명장 이순신이나 육지에서 공로가 상당히 컸던 권율, 김시민에 비하기엔 무리가 크다는군요. 종전 후 공신도감에서 이름이 거론되긴 했으나 최종적으로 18인의 선무공신에 들지 못했고,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인물들이 받던 선무원종공신에 봉해졌습니다.

상촌마을의 유허비 안내문 옆에는 대형 사적비가 보이는데, 이곳 사적비에는 위 위키백과사전과는 달리 장군이 선무공신(제1등)이라고 적혀있어 헷갈립니다. 실제와는 달리 후손들이 그의 공적을 과대평가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좌측에 충효교유관을 지나면 정자 등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우측에는 복원된 그의 생가가 있으며, 맞은편에는 사적비와 유사한 신도비가 있습니다.

                                                                                      사적비



 



 

 충효교육관

 정자

 공원

 생가

                                                                                     신도비



가장 안쪽에는 사당인 경충사입니다. 사당의 입구는 진령문(鎭嶺門)인데,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은 경충당, 우측은 장군의 유품을 보관한 기념관입니다. 맨 안쪽에 사당인 경충사가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기회가 있거나 하동의 명산인 금오산(849m)을 답사할 때 경충사 관내를 돌아보며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좋은 역사공부가 될 것입니다.   

 경충사 입구

 진령문

 

 경충당

 기념관


 

 사당 출입문

경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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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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