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소재 청령포는 영월읍에서 남서쪽 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청령포는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 해인 세조 2년(1456)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약 2개월 간 유배되었던 곳이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해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휩쓸려, 단종은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영월지역에서는 동강과 서강이 합류하여 남한강을 이룬다. 청령포는 남한강의 상류인 서강의 한복판에 마치 섬처럼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남서쪽은 육육봉이라는 험준한 절벽과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 곳이다. 따라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갈 수 없게 되어 있어 유배지로서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밤이면 남몰래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청령포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예로부터 "영월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로 피서객과 낚시꾼이 많이 찾아온다.
청령포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만진이 작사하고 심수경이 노래한 "두견새우는 청령포 노래비"가 길손을 맞이한다. 『왕관을 벗어 놓고 영월땅이 웬말이냐/두견새 벗을 삼아 슬픈 노래 부르며/한양천리 바라보고 원한으로 삼년 세월/아, 애달픈 어린 임금 장릉에 잠들었네/∼』
3절까지 이어지는 노랫말이 심금을 울린다.
두견새 우는 청령포
입장권(어른 1,300원)을 구입한 후 청령포를 바라보니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무엇보다도 청령포의 노송과 육육봉의 산세가 서강에 반사되어 상하대칭형을 이루고 있다. 거울같이 잔잔한 강물은 배가 움직이자마자 잔물결이 인다. 두 척의 나룻배 중 한 척은 강심에 고정되어 있고 한 척만이 사람을 실어 나른다.
매표소에서 바라본 청령포
선착장에 내려가니 젊은 총각뱃사공이 기다리고 있다. 나룻터라면 노를 젓는 것이 제격인데 예상외로 기계장치를 부착한 동력선이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배를 타는 손님은 글쓴이 혼자뿐이다. 이용객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사람을 태워 나른다고 한다. 총각이 시동을 걸고 배를 돌리자마자 바로 시동을 끈다. 남아 있는 동력으로 순식간에 맞은편에 도착한다. 차라리 동력선보다는 방문객이 밧줄을 당겨 강을 건넌다면 훨씬 운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글쓴이를 내려주고 되돌아가는 배
소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신선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한껏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여름철 피서지로는 안성맞춤일 것만 같다. 소나무 숲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단종어소다. 왼쪽에는 사랑채가 있는데 단종의 궁녀와 관노가 머물렀던 처소이다.
청령포의 울창한 솔숲
사랑채
바느질 하는 침모
오른쪽 기와집인 본채로 들어선다. 마당에는 영조 39년(1763) 단종이 기거하던 곳을 의미하는 "단묘재본(端廟在本) 부시유지(府時遺止)"라는 비문을 새긴 비각이 있다.
단종어소 본채
단종이 거주했음을 알려주는 비
기와집 처마 밑에는 어제시(御製試)가 걸려 있는데, 임금이 지은 시라면 당연히 단종이 지었을 것이다.
단종의 시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
왼쪽의 방에는 한사람이 부복하고 엎드려 있는데 단종을 알현하는 선비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으면 이런 자세로 임금을 뵈었을까. 이를 바라보는 단종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그런데 왜 이 선비는 단종을 정면으로 보며 엎드리지 않고 옆으로 부복했을까. 천학비재(淺學菲才)한 글쓴이로서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단정하게 앉아 있는 단종 앞에 재현한 밀랍인형 하나가 단종에 관한 모든 것을 침묵으로 말해주고 있다. 소위 숙부라는 자가 어린 조카의 왕위를 이런 식으로 찬탈해서는 아니 된다고 역사는 준엄하게 심판하고 있음을 말이다.
단종 앞에 부복한 선비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부복한 까닭은?
단정하게 앉아 계시는 단종
궁녀와 어의(御衣)
단종어소와 가까운 곳에는 금표비((禁標碑)가 있다. 금표비는 강봉된 노산군이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른바 행동 반경을 제한하는 금지령 팻말이다. 영조 2년(1726) 세운 금표비는 또한 단종의 유배지임을 널리 알리고 일반백성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한 비석이다.
금표비
금표비의 안쪽에는 높이가 약 30m에 이르는 관음송(觀音松)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어 수령이 약 600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 소나무는 단종의 애타던 모습을 보고(觀) 들었을(音) 것이라 해서 이름지어졌으며, 국가지정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보호되고 있다.
관음송
관음송 옆으로 조성된 철책을 따라 왼쪽으로 오르니 바위봉인 노산대(魯山臺)이다. 단종이 아침저녁으로 올라 한양을 바라보았다던 곳으로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바위벼랑과 영월 서강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여기서 쳐다보는 노을은 유난히 붉은 핏빛이라고 한다. 서강 위에는 단종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오리가 유유히 떠다닌다.
노산대
노산대에서 바라본 육육봉과 서강
다시 뒤로 방향을 돌려 오르면 망향탑이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라고 한다.
망향탑
이제 청령포 답사를 마치고 다시 뭍에 오를 시간이다. 그러기 전에 청령포 안내문과 나란히 세워져 있는 영월군수의 "단종어가 낙성고유축문"을 소개하면서 선착장으로 향한다.
『경진년 2월 30일
영월군수 김태수 감히 고하나이다.
단종대왕이시여
나라의 운이 크게 돌아와 영월의 상스러운 복이 오도다.
신위를 봉안하여 지성으로 예를 행합니다.
대왕께서 돌아가신 후 어가를 돌보지 못하다가
군민의 총의를 모아 금일에야 낙성하게 되었으니
슬픈 마음 이길 길 없고 신민된 충절 부족함을 진실로 뉘우칩니다.
4천만 국민 모두가 대왕의 외로운 혼을 슬퍼하고 슬퍼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흐르는 눈물을 금할 길 없습니다.
비록 하늘 저편에 계시나 뭇 별들이 숭앙하고 있습니다.
어가를 복원함이 너무나 늦은 느낌이 있으나
이제 청령포 옛 어가에 다시는 지난날과 같이 어지러움 없을 것이니
평안하게 강림하여 백성들의 추앙함을 받으소서.
엎드려 비옵건데
존경이시어 작은 정성이지만 흠향하시고
더욱 우리를 비호하여 주시고 영월을 평안케 하여 주소서.
이에 감히 고유드립니다.』
<가는 길>
영월을 통과하는 38번, 59번, 31번 국도를 타고 영월읍내로 들어서면
청령포로 가는 이정표가 길을 안내한다.(2007.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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