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륜산 정상인 가련봉에서 북쪽으로 본 노승봉과 고계봉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전남 해남군 소재 두륜산(頭輪山, 700m)은 백두산의 "두"자와 중국 곤륜산의 "륜"자를 따서 붙인 산 이름입니다. 두륜산은 두륜봉, 가련봉, 고계봉, 노승봉, 도솔봉, 연화봉 등 여덟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 졌고, 각 봉우리 정상에서는 서해안과 남해안 곳곳의 다도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산입니다. 동백으로 유명한 두륜산 산자락에는 신라 진흥왕 5년(514년) 아도화상이 세운 대흥사(대둔사)가 있으며, 절 안에는 표충사를 비롯하여 국보와 보물을 여러 점 보유하고 있습니다.
산을 다니는 사람으로서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인 두륜산을 답사하지 못해 두륜산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느 산악회에서 두륜산 답사 공지를 보고는 즐거운 마음으로 신청했습니다. 서울에서 땅끝마을인 해남까지 가려면 버스로 적어도 5시간은 달려야 하기에 왕복 10시간은 소요되지요. 일반적으로 먼길을 떠날 경우 아침 출발시간을 30분 일찍 당깁니다. 그런데 이 산악회는 평소처럼 그냥 아침 7시(마지막 경유지)에 출발했습니다.
문제는 산행시간입니다. 정오에 현지에 도착했는데, 산악회 대장은 서울 귀경시간이 급하므로 오후 4시까지 버스에 탑승하라고 합니다. 두륜산에서는 겨우 4시간만 주어졌습니다. 두륜산을 가면 반드시 답사해야 할 봉우리는 가련봉 및 이웃하는 두륜봉입니다. 가련봉(700m)은 두륜산 정상이며, 두륜봉(630m)에는 명물인 구름다리가 있는 명소입니다. 이 밖에도 천년고찰 대흥사와 초의선사가 지낸 일지암, 그리고 국보와 보물을 보유한 북미륵암은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4시간으로는 날아다녀도 어림없는 일입니다. 산악회 측에서는 대륜봉에만 올랐다가 하산하라고 했지만 이래서는 멀리까지 답사를 온 의미가 없어집니다. 사실 여기까지 왔으면 적어도 5∼6시간은 주어야 하며, 두륜산의 중요 볼거리도 설명해야 하지만 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지요. 어차피 하루를 보내려고 작심했으니 현지에서 6시경 출발해도 11시경에만 서울에 도착하면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글쓴이는 일단 정상인 가련봉은 밟고 싶었습니다. 고찰 대흥사 일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서 눈에 보이는 전각만 사진을 찍고는 일행을 따라 가다가 우측의 일지암 이정표를 보고는 홀로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39세 때(1824) 지어서 1866년(고종3)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40여 년 간 이곳에서 살면서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하고 차 문화를 편 곳입니다. 겉으로 보는 일지암은 여타 암자와 별만 달라 보이지 않았고, 또 시간이 촉박해 겉모습의 사진만 몇 장 찍고는 암자 오른 쪽으로 진입합니다.
대흥사 일주문
대흥사 경내를 통과하는 사람들
일지암
좌측의 울타리를 따라 이어지던 호젓한 산길은 잠시 후 Y자형 갈림길로 변했는데 어느 쪽으로 갈지 망설이다 울타리 쪽 길 대신 우측 길로 들어섭니다. 산허리를 따라 거의 평행으로 길이 이어지는데 앞뒤로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으니 걱정이 앞서다가도 지형상 이쪽으로 가면 두륜봉으로 이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내친 김에 발걸음을 옮깁니다. 외딴 기와집을 지나 조금 더 가자 진불암입니다. 진불암은 두륜봉 능선 아래에 위치한 암자라 길을 제대로 찾았음을 알고는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진불암 우측에는 두륜봉까지의 거리가 0.8km 라는 이정표가 붙어 있었거든요.
호젓한 기와집
진불암
진불암에서 두륜봉까지의 산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 두륜산 등산로는 어디에서 오르든 난이도가 꽤 높습니다. 때로는 너덜지역이 나타나기도 하고 급경사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특히 마지막 두륜봉을 오르는 구간은 정말 가파릅니다. 두륜봉 정상에 구름다리가 있다고 하기에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인공적으로 만든 구름다리인줄 알았지만 실제로 보니 자연이 만든 구름다리입니다. 이 구름다리는 정말 두륜산의 명물임이 틀림없습니다. 두륜봉에 오르니 다도해의 조망과 남서쪽의 대둔산(도솔봉) 및 북쪽의 가련봉의 조망이 일품입니다. 특히 눈앞에 펼쳐진 가련봉은 거대한 바위덩어리 그 자체입니다. 대흥사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꼭대기만 암봉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산 전체가 거대한 암석입니다.
두륜봉
두륜봉에서 바라본 정상인 가련봉
대흥사 방면을 바라보는 스님
위봉 방면 조망
구름다리
만일재 쪽으로 가려면 구름다리를 밑으로 빠져나가야 합니다. 거의 직벽에 가까운 철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는데 올라오는 사람들과 합류해 지체가 발생합니다. 산에서도 교통정체로군요. 일단 여기만 내려서면 만일재까지는 길이 좋습니다. 같은 산악회 소속 등산객 몇 명이 만일재 쪽에서 올라오는 게 보입니다. 드디어 만일재에 도착했습니다. 벌써 시간은 13시 50분입니다. 하산 시까지 2시간 10분이 남았네요. 현지 등산객에게 가련봉을 다녀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더니 금방 다녀 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산에서는 이런 쉬운 대답에 조심해야 합니다. 실제로 글쓴이가 정상(가련봉)을 다녀오는데 무려 55분이 소요되었기 때문입니다.
구름다리 및 내리막길
만일재와 가련봉
가련봉을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지만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확 터지는 조망에 넋을 잃을 지경입니다. 그렇지만 길손은 마음이 급해 주변의 경치를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설악산 귀떼기청봉 같은 너덜지대를 지나면 철계단인데 이를 올라도 정상은 아직 아닙니다. 맞은편 정상을 바라보면서 저기를 어떻게 오를지 벌써 오금이 저려옵니다. 그렇지만 산에는 항상 길이 열려 있습니다. 안전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네요. 만일재를 출발한지 30분만에 드디어 가련봉(700m)에 올랐습니다. 두륜산의 최고봉인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題)입니다. 북쪽으로는 노승봉(682m) 너머 고계봉(636m)이 허연 암봉을 드러내고 있고, 남쪽으로는 지나온 가련봉 능선과 두륜봉 그리고 멀리 대둔산(도솔봉)이 아득합니다. 서쪽으로는 육산처럼 보이는 산자락에 대흥사 가람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고, 동쪽은 농경지와 남해바다가 아련합니다.
기암
너덜지대
철계단
철계단에서 뒤돌아본 두륜봉
가야할 정상
가련봉 정상
지나온 능선
북쪽 노승봉
이런 곳에 서면 솔직히 하산하기 싫지만 길손에게는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글쓴이로 인해 등산버스가 기다리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일재로 되돌아오는 길은 한결 쉽지만 안전사고는 주로 하산 길에서 발생하므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재에서 두륜산의 또 다른 명물인 억새를 보고는 대흥사로 내려섭니다. 조금 가니 북미륵암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지만 답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보물에서 국보로 바뀐 북미륵암의 마애불상을 보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군요. 대흥사에 도착해 마치 달리기하듯 대웅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을 카메라에 담고는 일주문을 지나 단풍거리로 나옵니다. 아직 대흥사 앞 명물단풍은 때가 이른 듯 하군요. 바쁜 걸음으로 주차장에 도착하니 4시 10분전입니다. 가까스로 약속시간에 닿은 것입니다.
너덜지대 하산
기암
만일재 억새군락지
대흥사
늦게 도착한 어느 등산객을 기다려 20분 늦게 출발한 것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큰 주차장에서 버스가 정차합니다. 운전기사가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귀 달리고 이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운전기사라면 당연히 기다라는 4시간 동안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게 순리입니다. 한 사람의 식사를 위해 버스를 20분 동안이나 세운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늦은 등산객을 기다린 시간 20분과 버스기사의 식사시간 20분을 합쳐 모든 등산객에게 산행시간을 1시간만 더 주었더라면 글쓴이도 북미륵암을 다녀왔을 것입니다. 운전기사가 오늘 처음 왔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산악회 측의 명백한 실수입니다.
문제는 이 산악회 버스가 매우 소란스럽다는 점입니다. 내려갈 때는 흘러간 옛노래(섹스폰 연주 포함)를 잔잔하게 틀어주어 귀를 즐겁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귀경길 버스 안은 시장터보다도 더 시끄러웠습니다. 특히 여성 몇몇은 차안에서 놀고 싶다고 했고 산악회 회장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1시간 동안만 놀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논다는 말은 사람들이 버스중앙 복도로 나와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는 뜻이더군요. 음악이 흘러나오자 4-5명의 여성과 1-2명의 남성이 몸을 흔듭니다. 불과 몇 명의 기분풀이를 위해 말 없는 다수는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얼른 시간이 흐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산악회장은 춤을 추는 도중에게 만일 급제동으로 넘어져 다치더라도 운전기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을 고지시켜 주더군요. 실제로 사고가 났을 경우 이 말의 효력이 있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행위는 단속대상이므로 운전자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행히 약 30분이 지난 후 휴게소에 들러 소란은 끝이 났습니다. 다시 버스가 달리자 한 여성은 좀더 놀아야 한다면서 주최측을 압박하지만 산악회에서 이 말을 무시한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남성이 유행가를 크게 튼 노래기기를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복도를 왔다갔다하니 등산객들은 억지로 이 노래를 들어야만 했고, 뒷좌석의 남자 몇 명이 큰소리로 계속 떠드는 바람에 조용히 피로회복을 원했던 글쓴이는 그만 파김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본이 전혀 안된 엉터리 산악회 버스를 처음 탔다가 미숙한 운영으로 산행도 서둘러야 했고 일부 몰상식한 구성원들 때문에 귀경길도 고행길이라 매우 힘든 하루였습니다.
《등산 개요》
▲ 등산 일자 : 2013년 11월 12일 (화)
▲ 등산 코스 : 대흥사 주차장-대흥사-일지암-진불암-두륜봉-만일재-가련봉(왕복)-만일재-대흥사-주차장
▲ 소요 시간 : 3시간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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