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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落星垈)는 고려 명장 인헌공 강감찬(984∼1031)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장군은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우려 그 당시 백성들에게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백성들은 장군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집터에 삼층석탑을 세우고, 장군이 태어날 때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그 뒤 낙성대를 보호하고 기념하기 위해 나라에서는 1973년부터 2년 간에 걸쳐 안국사라는 사당을 짓고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현재 낙성대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자료 :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과 사당역 사이에 낙성대역이 있다.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의 사당이 있는 곳이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전에 지하철을 탓을 때 한 노인이 "서울대가 낙성대보다는 좋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정도이다.


낙성대는 역에서 내려 약 1.5km정도 걸어가야 한다. 공원입구로 들어서니 강감찬 장군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웃한 작은 호수주변에는 산책로가 형성되어 있다. 마침 서서 미는 보조기구를 가진 한 할머니가 이 기구를 천천히 말며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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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입구의 호수

장군의 사당인 안국사로 들어가는 안국문을 통과하니 깔끔하게 조경이 된 경내가 보인다. 좌측에는 삼층석탑이, 우측에는 장군의 사적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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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으로 출입하는 안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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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문에 들어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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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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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비

삼층석탑은 꼭대기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그 주위에는 옥잠화가 꽃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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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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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으로 뒤돌아 본 모습


안쪽 계단 위에는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안국사(安國祠)이다. 큰 영정 앞 제단에는 향이 불타고 있는 가운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과 과일 등이 올려져 있다. 장군이 가신지 977년이 지났건만 후손들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음은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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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사당인 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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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사에서 뒤돌아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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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내부는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어서 겉모습만 카메라에 담았다.


거란의 침입과 격퇴(자료 : 다음 백과사전)


1010년(현종 1) 거란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조정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이에 놀란 조정의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했으나, 강감찬은 이를 반대하고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왕을 나주로 피신하게 했다. 왕의 피신중에 양규(楊規)가 곽주(郭州)에서 적을 무찌르고, 하공진(河拱辰)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고려는 항복의 치욕을 면하게 되었다.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현종이 친히 조회(朝會)하지 않은 것과 강동(江東) 6성을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 : 지금의 평안남도 자산)와 신은현(新恩縣 : 지금의 황해도 신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다. 침략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니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현종은 그의 손을 잡고 금화팔지(金花八枝)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했다.

거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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