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주걱봉(우)과 삼형제봉(중앙) 및 1246봉(좌)
국립공원 설악산은 남북으로 뻗은 공룡능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외설악, 서쪽을 내설악이라고 부릅니다. 또 동서로 이어진 서북능선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설악, 남쪽은 남설악이라고 합니다. 설악산은 우리나라의 산중에서 산중미인(山中美人)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세와 조망이 빼어나 연중 찾은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설악산에는 안전 또는 동식물보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출입제한 구역이 다수 있습니다. 글쓴이가 알고 있는 곳만 해도 북설악의 황철봉, 외설악의 화채봉, 서북능선상의 안산, 남설악의 가리봉 및 점봉산 등이 생각납니다. 당국으로서는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는 게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법이겠지만 이곳을 꼭 답사해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다. 특히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황철봉과 점봉산 구간은 백두대간 종주꾼들이 법령을 위반해서라도 반드시 답사해야할 구간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단속을 피해 주로 야간에 움직여 안전과 동식물 보호에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말이 들릴 정도입니다.
설악산 국립공원 장수대지구(인제군 북면)에는 가리봉(1,518m), 주걱봉(1,401m) 및 삼형제봉(1,225m)이 있는데, 서북능선을 거닐며 바라보는 세 봉우리의 능선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산꾼이라면 누구나 오르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출입제한지역으로 묶여 있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오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더욱이 안전시설이 전혀 없어 상당히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려 평소 투철한 준법정신과 안전을 생활화하는 글쓴이는 가리봉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가 가리봉을 답사했다는 사람들의 소식이 점점 들려오기 시작하고 나이가 자꾸만 들어감에 따라 더 이상 늦추면 영영 기회가 사라질 것이라는 초조함으로 인해 이번에 과감히 가리봉 산행을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난 10여 년 간 등산을 다녀온 이후 알량한 산행후기를 작성해서 블로그에 게재해 왔지만 이번 후기를 작성할지 말지 꽤 고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출입제한지시를 위반한 게 자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답사를 하고 보니 정말 만감이 교차해 이를 평가하고 앞으로의 개선방안을 제시해 보려고 감히 펜을 잡았습니다.
설악산 서북능선의 안산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가리봉(좌)과 주걱봉(그 우측 암봉) 그리고 삼형제봉의 모습
설악산 등산지도를 펼치면 가리봉으로 접근하는 들머리는 장수대 서쪽 옥녀탕 휴게소와 한계령입니다. 또한 최근에는 필례약수 방면도 이용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곳은 잘 알려진 곳이라 국립공단 관계자의 단속이 심해 다른 루트를 이용한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우리는 주걱봉과 가리봉 갈림길로 올라 가리봉을 왕복한 후 주걱봉 산허리를 돌아 하산하기로 했습니다. 주걱봉은 거대한 암봉으로 되어 있고 또 안전시설이 전혀 없어 오르지 못하는 봉우리입니다.
주걱봉과 가리봉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조금 오르니 주능선인 가리봉 능선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바라보는 서북능선 안산의 풍경을 보고는 숨이 막힐 듯 했습니다. 가리봉으로 오르는 길은 다소 가파른 암릉구간이 있기는 했지만 보통사람도 별 문제 없이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등산로가 매우 뚜렷했습니다. 정상에는 막대형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가리봉 능선에서 바라본 안산
가리봉의 모습
가리봉을 오르며 바라본 주걱봉(좌)과 안산(우)
가리봉 정상은 그야말로 사방팔방으로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조망이 터집니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주걱봉과 삼형제봉의 위용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서북능선의 안산과 귀때기청봉 그리고 한계령 뒤로는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까지 바라보입니다. 대청봉 맞은편의 점봉산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며 소가리봉 뒤로 끝없이 펼쳐지는 이름 모를 첩첩한 산그리메는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 합니다. 사람들은 단속에 걸리면 낭패를 당할 줄 알면서도 이 풍경을 보기 위해 가리봉을 찾을 것입니다.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은 매우 무더운 날씨였지만 남부지방에서 불어오는 태풍의 영양으로 시계(視界)가 맑은 점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서쪽으로 바라본 주걱봉(우)과 삼형제봉(중앙) 및 1,246봉(좌)
서북능선의 안산
귀때기청봉 뒤로 보이는 대청봉
한계령(좌)과 점봉산(우)
소가리봉
주걱봉과 안산사이로 지나가는 44번 국도
가리봉에서 아까 지났던 갈림길로 되돌아와 다시 앞으로 진행합니다. 가파른 산허리를 돌아가는데 아무런 안전시설도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곳만 통과하면 능선에 오르고 바로 눈앞에는 쌍봉의 모습을 한 주걱봉이 반겨줍니다. 이곳을 내려와 조금 더가서 비탈면에 등산리본 두 개가 걸린 곳을 들어서서 넘어가면 오늘 산행 중 가장 위험한 곳에 다다릅니다. 거의 직벽을 내려서야 하는데 이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다행히도 안전로프가 한 개 걸려 있기는 하지만 밑으로 내려서서 옆으로 이동하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전문가가 먼저 내려선 후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잘 안내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전에는 옆으로 통과(트레버스)할 수 있는 로프가 걸려 있었지만 지금은 제거되고 없는 상황입니다.
상당히 위험한 등산로
쌍봉인 주걱봉
삼형제봉과 1246봉
올라가는 길
가장 위험한 구간(사진으로 보기보다는 실제 위에서 보면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음)
이 구간을 통과하고 나면 하산할 때까지 위험한 구간을 없습니다. 지나가면서 주걱봉을 바라보니 천길 낭떠러지의 위용이 정말 대단합니다. 삼형제봉의 정상을 오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걱봉을 우회한 후 삼형제봉 갈림길에서 하산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약 8.5km 산행에 6시간 반정도 걸렸습니다. 가리봉까지 오르는 길이 매우 가팔랐고, 위험구간을 통과하느라 신경을 많이 썼으며, 무더위로 땀을 많이 흘린 탓에 체력이 바닥나 거의 탈진상태가 되었습니다.
주걱봉의 바위사면
남쪽의 안가리산 방면
막상 그간 벼르던 가리봉을 무사히(?) 답사했지만 솔직히 단속에 마음을 졸이면서 가리봉을 반드시 올라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특히 가리봉에서 주걱봉으로 가는 급경사 구간에 안전시설이라고는 겨우 로프 한 개뿐이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합니다. 또 단속에 걸리면 재수가 없고 걸리지 않으면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당국은 이곳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을 범법자로 만드는 출입제한 조치를 재고할 수는 없는 지 묻고 싶습니다. 외설악 달마봉(526m)의 경우 평소에는 출입금지구역이지만 설악문화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사전허가제로 개방해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금산지구에서는 2년 전부터 부소암코스를 정비해 개방하여 사람들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가리봉의 경우 한계령에서 오르는 등산로 상태는 상당히 양호하다고 듣고 있습니다. 가리봉도 한 곳 정도의 등산로를 일정한 조건 하에 개방하여 등산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를 건의합니다.
앞으로 가급적이면 가리봉은 오르지 않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특히 겨울 적설기에는 아무리 아이젠을 착용한다해도 출입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너는 오른 후 무슨 헛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안전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만일 단속이라도 걸려 10만원의 과태료(자연공원법상 30만원 이하)를 물게 되면 기분을 잡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험구간에도 안전시설(당국에서 불법 안전시설은 전부 철거하였다함)이 전혀 없어 길이 매우 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하게 꼭 올라야 한다면 주걱봉 방면은 얼씬도 하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얻는 것은 거의 없으면서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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