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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와 고종이 잠든 남양주 홍릉

 

 

 

조선 말기 고종황제의 비인 명성왕후는
드라마와 뮤지컬로도 잘 알려진 비운의 황후입니다. 
그럼 먼저 명성황후에 대해 살펴본 후

그녀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명성황후는 누구인가?
 
명성황후(1851-1895)는 고종 3년인 1866년 친척이었던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을 받아 16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 후 대궐 안의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전통과 현대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추게 되었다. 시아버지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자 고종임금을 내조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왕조의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1876년 일본과의 수호통상을 시작으로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고, 청나라에 영선사를 보내어 서구유럽과 이웃나라의 선진문물과 기술을 배워오게 하였으며, 1882년 영국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1884년 프랑스와 수교이후 개신교의 포교가 하락되었으며, 1886년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이름을 하사하는 등 많은 외교적 노력과 업적을 이루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개혁을 구실로 우리나라의 왕권과 국권을 침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이를 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적으로 적을 치게 함)의 뛰어난 국방외교전략을 강구하였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외교력으로 대 러시아 외교관계가 급진전을 보이자 당황한 일본은 마침내 1985년 10월 새벽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미사변)을 저질러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자료 : 여주군 안내서).

 

 

 

 


▲ 명성황후가 태어나 8세까지 살던 집, 여주 명성황후 생가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소재 명성황후생가는
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 집입니다.
당시 건물로서 남아있는 것은 안채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습니다.

 

생가와 이웃한 명성황후기념관은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되었으며,
전시실에는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복제품),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전 영상물 등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음은 아쉬움으로 남는군요.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기념관

 

 

 

 

▲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의 현장, 경복궁 건청궁

 

건청궁은 경복궁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향원정(香遠亭)의 뒤에
위치한 건물로 2007년 복원되어 일반에게 개방되었습니다.


건청궁은 전통적인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지은 건물이기 때문에 
전통 한옥의 옛 풍취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건청궁의 단풍
 

 

 


고종은 1873년(고종10년)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는데요.
건청궁은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坤寧閤, 명성왕후의 거처),
 왕의 처소인 장안당(長安堂, 고종의 거처),
서재인 관문각으로 이루어 져 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공사관직원, 일본군, 일본자객들이 건청궁에 난입해
 곤녕합의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왕후를 찔러 죽이고
 그녀의 시신마저 청휘문을 통해 바로 옆에 있는
"녹산(鹿山)"에서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종의 거처인 장안당

 

 

 

 

 장안당 옆 추수부용루

 

 명성황후가 시해된 옥호루(우) 및 처소인 곤녕합(좌)

 

 옥호루

 

 곤녕합

 

 명성황후 처소 입구

 

 

 

 

 


▲ 명성황후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곳, 경복궁 태원전

 

경복궁 태원전은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새로 건립한 건축물로 주로 빈전(殯殿)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빈전은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입니다.
왕과 왕비가 죽으면 빈전에 시신이 든 관을 모시고
교외에 마련된 산릉에 관을 묻은 후에는 혼전(魂殿)에 신주를 모셔
정해진 장례기간을 채운 후 종묘로 신위를 옮겨 모시게 됩니다.

 

1890년(고종 27) 익종(翼宗)의 비인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조씨(趙氏)의 국상(國喪) 및 
1895년 명성왕후(明成皇后, 1851∼1895) 민씨(閔氏)가 시해되자
그녀의 빈전으로 쓰였습니다.

 

왕과 왕비가 죽으면 보통의 국상기간은 약 5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명성황후의 경우 약 2년이 걸린 것은
훼손된(불에 탄) 시신을 수습해 안치하는데 오래 걸렸고,
구한말 나라재정이 어려웠으며,
일제의 의해 피살된 황후의 국상을 오래 치름으로서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조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태원전

 

 

 

 

 

 태원전 앞 단풍 
 

 

 

 

▲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든 곳, 남양주 홍릉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소재 홍유릉은 홍릉과 유릉을 합친 말입니다.
홍릉(洪陵)은 고종과 황비의 능이고, 유릉(裕陵)은 순종과 황비의 능입니다.
따라서 명성황후의 능은 고종과 합장한 홍릉(서울 홍릉과는 다름)입니다.

 

홍릉과 유릉은 다른 일반적인 조선왕릉과는
몇 가지 점에서 매우 특이한데 
이는 조선시대 임금을 왕이라고 칭하다가
고종과 순종 때에는 황제라고 불렀으므로
왕릉도 황제릉 형식으로 조성했다는 것입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르는 참도는 신도와 어도 둘인데
홍릉의 참도는 세 개이며
참도 양쪽으로 문인석-무인석-해태-코끼리-
사자(2기)-낙타-말(2기)을 순서대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또 정자각 대신 침전이라는 이름의 제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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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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