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과 만경강의 분수령에 자리잡고 있는 운장산(雲長山, 1,126m)은 진안고원의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는 고산입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북 진안군 정천면·부귀면·주천면 그리고 완주군의 동상면에 걸쳐있습니다.
운장산의 동쪽으로 연(連)하여 복두봉(1,018m)과 구봉산(1,002m)이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 2.5km 지점에 연석산(925m)이 있습니다. 오늘은 운장상과 연석산을 종주하는 산행을 하기로 합니다.
기상청에서는 주말을 맞아 강원영동지방에 많은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발령했습니다. 전북지방에도 어느 정도 눈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주자천계곡을 들어서 경승지로 이름난 운일암과 반일암을 지나 산행들머리인 연동마을(연석사 입구)에 이르자 눈은 거의 보이지 아니합니다. 겨울의 산행은 설경을 보기 위한 것인데 눈이 없으니 실망스럽습니다.
연석계곡으로 접어드니 때아닌 맑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겨울의 계곡은 말라 있거나 물이 흐르더라도 얼음 밑으로 졸졸 흘러야 정상인데, 이렇게 물보라를 일으킬 정도로 많은 물이 흐르는 것은 예상 밖입니다. 아마도 최근에 내린 눈이 포근한 날씨로 인해 전부 녹아 내린 듯 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연석계곡은 풍부하고도 맑은 물, 2단과 3단의 크고 작은 폭포, 빙빙 도는 소(沼), 울창한 숲 등 천혜의 비경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곳이라고 합니다(자료 : 한국의 산하). 따라서 우기에 이곳을 찾는다면 이런 비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풍부한 계곡의 물
아직까지 붉은 빛을 띤 채 등산로 주변 계곡에 남아 있는 화려한 단풍잎이 지난 가을 얼마나 절정의 불꽃을 피웠을지 상상이 됩니다.
점점 고도를 높임에 따라 짙은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고돕니다. 몇 십 미터의 전방도 잘 보이지 않을 지경입니다. 다만 서서히 상고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흩뿌리는 눈발이 대지를 덮고 있습니다. 계곡을 지난 등산로는 능선으로 붙었지만 길이 아주 부드럽습니다. 뒤돌아보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허연 안개뿐입니다.
볼품 없는 정상표지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만에 드디어 연석산(硯石山) 정상(해발 960m)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잔뜩 기대를 가지고 처음 찾은 연석산이 두 가지 점에서 글쓴이를 실망시킵니다. 첫째는 정상에 올랐지만 아무런 조망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희뿌연 안개는 이웃 산의 형체조차도 보여주질 않습니다. 이정표가 없으면 방향감각마저 잊어버릴 지경입니다.
두 번째는 정상 안내표지입니다. 한 신용금고 회사의 협찬으로 세운 전북지방 특유의 이 표지는 정말 볼품이 없습니다. 널빤지처럼 생긴 긴 직사각형의 알루미늄막대기에 쓴 산 이름은 거의 지워진 상태고 신용금고의 상호만 크고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런 표지는 곧 가야할 운장산의 정상에도, 몇 년 전 오른 부귀산(806m)에도, 그리고 전북지방의 다른 산에서도 자주 목격되었습니다.
뒤돌아 본 연석산
산의 정성표석(표지)은 그 산의 얼굴입니다. 힘들여 오른 산에 표석이 없거나 있더라도 볼품이 없으면 단박에 실망하고 맙니다. 산을 다녀 보면 각 지역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경기도 지역은 직사각형으로 말뚝형식의 밝은 화강암표석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충청도 지방은 밑단을 만들고 그 위에 비석처럼 오석(烏石)으로 만든 표석을 설치해 두고 있는데,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반면 경남서부지방의 경우 예컨대 황석산, 거망산, 금원산, 기백산 등에는 유명 서예가가 쓴 글씨체로 아담한 표석을 제작하여 세워둔 것이 애교가 있어 보입니다.
연석산 오름 길은 매우 부드러웠지만 운장산으로 이어지는 하산 길은 급한 내리막으로 시작됩니다. 등산로에는 제법 눈이 있지만 걷는 데는 불편함이 없습니다. 연석산과 운장산을 가르는 고갯마루가 만항재인데 이정표가 없으니 그냥 스쳐 지나고 맙니다.
키가 무성한 산죽 (山竹)사이로 길은 이어집니다. 지루한 능선길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오르막으로 변합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로프가 매달려 있는 구간도 나타납니다.
산죽 군락지 산죽 군락
이제 운장산 서봉을 치고 오르는 중입니다. 왼쪽으로 살짝 돌아가는 길에도 눈을 함빡 머리에 쓴 산죽의 군락이 있습니다. 새파란 산죽 잎에 소복이 쌓여 있는 눈의 모습이 꼭 미꾸라지 튀김을 보는 듯 합니다.
또다시 가파른 오르막으로 연결되어 드디어 아이젠을 착용합니다. 아까 연석산을 오르며 눈이 적다고 불평한 것이 후회될 정도로 이곳에는 지천으로 눈이 쌓여 있습니다. 조그만 해발고도의 차이가 이토록 적설량에 변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산죽 군락 운장산 서봉 표석
제법 숨을 헉헉거리고서야 드디어 서봉(1,122m)에 오릅니다. 생후 두 번째로 서봉에 올랐지만 다시 본 아담한 정상표석만이 반겨 줄뿐 주변은 온통 안개뿐입니다. 가야할 운장산과 동봉의 모습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쪽으로 보여야 할 산하도 전혀 분간이 안됩니다. 하늘은 이 길손에게 그 비경을 다시 보여주기를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형체만 보이는 가야할 운장산 정상 뒤돌아본 서봉 뒤돌아 본 서봉
서봉은 일명 "오성대"라고 하는데, 조선 중종 때의 서출(庶出)인 성리학자 송익필이 은거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문하에 김장생과 김집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한 송익필의 자(字)가 운장(雲長)이었기에 이 산의 명칭을 그때부터 운장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자료 : 한국관광공사). 한편, 구름에 가리워 진 시간이 길다 해서 운장산이라고 했다는 말도 전합니다.
동봉에서 운장산 정상까지는 거리가 700m입니다. 암봉인 서봉을 내려오는 길이 무척 가파릅니다. 한참 가다가 뒤돌아보니 방금 하산한 동봉이 매우 위압적인 모습으로 희미한 형체를 드러낸 채 굽어보고 있습니다.
운장산 정상표지와 통신시설물
통신시설이 설치된 운장산 정상(1,126m)에는 실망스런 정상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이외로 꽤 높은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양쪽에 의자(벤치) 두 개가 마주 보고 놓여 있지만 갈 길이 바빠 앉아 볼 여유도 없습니다.
운장산에 서면 북으로는 대둔산, 남으로는 모악산과 마이산 및 내장산, 동쪽으로는 구봉산을 지나 덕유산이 자리하고, 서쪽으로는 드넓은 호남 평야가 손에 와 닿는 조망대라고 하는데, 오늘은 안개로 인하여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운장산의 삼각점 운장산에서 바라본 가야할 동봉
이제 동봉으로 가야할 차례입니다. 내려서는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3년 전 이미 글쓴이는 운장산의 서봉과 정상 그리고 동봉을 거쳐 구봉산까지 종주산행을 하였기에 길이 낯설지 않습니다.
산죽군락지
동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암군이 있어 암벽 사이로 바라보는 경치가 그럴 듯 합니다. 드디어 동봉 정상(1,124m)입니다. 아담한 표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이 때 하루 종일 운장산을 드리웠던 짙은 안개가 약간 걷히기 시작하여 지나온 서봉과 운장산(정상)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동쪽 방향의 조망은 여전히 불가능합니다.
눈을 뒤집어 쓰고 있는 산죽 암벽 사이로 바라본 지나온 운장산 동봉 인근의 선바위 동봉 표지석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운장산(좌측)과 서봉(우측) 종이로 접은 학처럼 보이는 산죽
이제 내처사동으로 하산할 차례입니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구봉산으로 이어지지만 우리는 왼쪽으로 내려섭니다. 능선 길에 눈꽃이 피어 있는 소나무가 있어 이를 카메라에 담습니다. 여러 차례 지체하며 설경을 렌즈에 담아 보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카메라도 주인을 잘 만나야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등로의 소나무
바람서리꽃(상고대)과 눈꽃이 점점 잦아들더니 드디어 도로가 보입니다. 개울을 건너자 외딴 집에 매어둔 개가 이방인을 보고 짖기 시작합니다. 내처사동 주차장에 도착하여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연석산과 운장산의 서봉에서 짙은 안개로 조망을 전혀 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웠지만 서봉 오르막길과 동봉 내리막길에서 많은 눈을 밟았으며, 아름다운 눈꽃과 바람서리꽃을 감상한 뜻 깊은 산행이었습니다.
《산행 개요》
▲ 산행 일자 : 2008년 1월 12일(토)
▲ 산행 코스 : 연석산-만항재-운장산 서봉-운장산-운장산 동봉-
내처사동
▲ 소요 시간 : 5시간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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