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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매화축제는 끝났지만 매화의 개화소식은 점점 북상하면서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준다. 매화는 사군자인 매난국죽(梅蘭菊竹)의 하나로 고래로부터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은 꽃이다.

우리 역사상 인물 중 "매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다. 퇴계의 매화사랑은 남달라 1백 편 이상의 관련 시를 남겼는데, 특히 관기 두향(杜香)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소설가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전6권)의 3권 "명기두향(名妓杜香)" 및 "상사별곡(相思別曲)"편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한 권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들의 이야기가 잘 요약되어 있어 여기에 옮긴다.



퇴계 이황 선생은 매화를 무척 사랑했다. 이렇게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官妓) 두향(杜香) 때문이었다. 퇴계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것은 48세 때였으며,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매우 빳빳했던 퇴계. 그러나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퇴계선생은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향은 시서(詩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겨우 9개월만에 끝나게 되었다. 퇴계선생이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변고였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에게는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며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마져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간곡한 청으로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퇴계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선생은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퇴계선생은 두향을 보듯 매화를 애지중지했다. 선생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퇴계선생은 그 뒤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등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에 은거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퇴계선생 마지막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매화에 물을 주어라."
선생의 그 말속에는 선생의 가슴에도 두향이가 가득했다는 증거였다.

퇴계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간을 걸어서 안동을 찾았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두향의 사랑은 한 사람을 죽기까지 사랑한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

그 때 두향이가 퇴계선생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代)를 잇고 이어, 지금 안동의 도산서원 입구에 그대로 피고 있다고 한다.』(자료 : 다음카페 "퉁뱅이사람들") 




소설가 최인호의 퇴계관련 이야기는 작가가 충주호반(남한강변)에 위치한 두향의 묘소를 직접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위 요약된 글을 읽으면 의문이 하나 남는다. 퇴계선생이 단양을 떠난 후 두향은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선생과 함께 자주 찾았던 남한강변에 초막을 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사모하는 님을 찾아 풍기로 가지 않았을까.

아니 그보다도 퇴계선생도 두향을 이토록 아끼고 사랑했다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두향을 관기에서 빼주거나 아니면 풍기군의 관기로 데리고 가지 않았을 까. 당시의 관기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을 까. 아니면 평생 한곳에서만 관기노릇을 해야만 했을 까. 당시 관기제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필자는 이런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물론 그 당시 퇴계가 두향을 풍기로 데리고 갔더라면 그들의 사랑이야기가 이처럼 애잔하게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생과 대유학자의 사랑이야기는 어쩌면 지어낸 이야기 같으면서도 최인호의 위 소설을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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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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