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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이를 줄 왜 몰랐나, 사랑 사랑 내 사랑아!
나는 죽어 꽃이 되고, 너는 죽어 나비 되어 
푸른 청산 찾아가서 천년 만년 살고 지고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때는 17세기 중반 조선 인조 때, 경기도 안성천에서 한 여인의 애잔한 노래 소리가 계곡에 메아리칩니다. 그 노래 소리는 계곡을 넘어 대지로, 하늘로, 그리고 종국엔 온 누리에 울려 퍼집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인의 노래가 이토록 인간의 심금을 울린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드라마 다시 보기를 하는 이 순간에도 코끝이 시큰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월악산 산채를 홀로 떠난 설화(김하은 분)는 정처 없이 대길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가 대길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길을 떠나는 짝귀(안길강 분)를 만납니다. 설화는 대길의 행방을 물었고 짝귀로부터 안성천이라는 말을 듣자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종종걸음칩니다.

그녀가 안성천 계곡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이후입니다. 관군과 청나라 용골대 수하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가운데, 자신이 이겼다고 선언한 철웅(이종혁 분)과 관군도 철수한 상태입니다. 그곳에 한 남자가 피묻은 칼을 부여잡고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바로 대길(장혁 분) 오라버니입니다. 설화가 태어난 후 처음으로 가슴에 품은 남자입니다. 13살 때부터 사당패에 들어가 몸을 팔던 설화였습니다. 


"오라버니! 왜 이러고 있어? 오라버니, 나 왔어!"
설화는 억장이 무너집니다. 대길이 눈을 부라리며 "이년아! 왜 월악산 산채에서 나와 이리로 왔느냐? 미친 년! 한심한 년!" 이렇게 욕을 해야 정상인데,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땅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설화는 기가 막힙니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대길 오라버니를 찾아 왔는데 오라버니가 지금 정신의 줄을 놓고 있습니다.



(2)
대길로부터 도움의 서한을 받은 월악산 짝귀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곧 떠날 채비를 하라고 일장연설을 합니다. 마지막에 "에~ 그러니까~ 보자~"하기에 무슨 중요한 말을 더하나 했는데 별안간 "해산!"이라고 외치는 장면이 정말 익살스러운 짝귀답습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 있는 사람들 틈에 보따리를 챙겨들고 있는 설화에게 왕손이(김지석 분)가 묻습니다.
"넌 왜 소 팔러 가는데 개 따라 오듯 쫄래쫄래 따라가?"

화들짝 놀란 설화가 반문합니다.
"안 따라 간다니까! 나도 내 갈 길이 있는 년이야! 왜이래?"


이제 설화와 연년이(이다해 분)도 헤어질 시간입니다. 먼저 언년이가 말문을 엽니다.
"가면 잘 잘아요!"

설화가 대답합니다.
"언니도 부군이랑 애기랑 잘 살아요!"
"도련님 잘 부탁해요!"
"그럼요! 대길 오라버니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아주 그냥 깜빡 죽어요!"

이 말을 들은 왕손이가 조용히 있을 리 없지요.
"저게, 저게, 똥구멍에 헛 바람만 잔뜩 들어 가지고, 깜빡 죽기는? 너 그러다 진짜 죽는다?"

왕손이는 대길이 설화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길이 설화에게 한번도 다정한 말을 한 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당패에서 노래를 부르던 설화가 대길패거리에 합류했을 때 여자킬러인 왕손이가 그녀를 가만 둘 리가 없었지요. 그렇지만 왕손이는 설화가 대길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더 이상 수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3)  
이렇게 하여 설화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찾아와 대길과 감격의 재회를 했지만 지금 오라버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길이 주먹으로 철웅을 때려 그를 피범벅이 되도록 만들 때는 대길이 승리하는 듯 했지만 이외의 결과가 초래된 것입니다.          

"오라버니! 나 보여?"
이 때 고개를 돌린 대길이 겨우 입을 엽니다.
"조잘조잘, 우리 꼬맹이 왔구나! 왜 따라 왔어? 이년아!"
"사내들 약속을 어떻게 믿어?"

"어여 네 길을 가야지!"
"오라버니, 우리 집에 가자! 내가 밥도 해 주고, 빨래도 해 주고, 오라버니 줄려고 옷도 지었어!"

그러면서 보따리에서 옷을 꺼냅니다. 그 옷에는 대길(大吉)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설화는 월악산 산채에서 언년이로부터 글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언년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그녀가 하는 행동과 몸짓을 따라 하기도 했지요.


"이거 봐, 이게 오라버니 이름이야! 나 이제 글도 읽고 쓰고 다 할 줄 알아! 한자문도 다 배웠어! 이제 나랑 다니면 하나도 안 창피할 거야! 그까짓 사랑이 뭐라고! 세상에 널린 게 여자고, 널린 게 남자인데~" 

이 때 입에서 피를 흘리던 대길이 힘들게 손을 듭니다. 설화가 망설이다가 대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볼에 가져갔지만 실제로 대길은 언년이를 부른 것입니다. 
『언년아, 잘 살아라! 오랜 시간이 흘러 우리 다시 만날 때 어찌 살았는지 이야기해 주렴! 나의 언년아! 나의 사랑아!』 



대길은 송태하(오지호 분)가 언년이와 진심으로 잘 살기를 바랬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 태하와 동행하였고, 먼저 강가에 가서 배를 구해 기다리면서도 언년이의 꽃신을 꺼내 들고 그녀를 생각하며 행복을 빌었습니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챈 대길이 손살같이 달려와 철웅과 겨룹니다. 대길은 철웅의 칼을 맞고 쓰러진 태하에게 비장한 각오로 어서 가서 좋은 세상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태하를 부축하고 있는 언년이에게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습니다. "언년아, 꼭 살아라! 니가 살아야 나도 산다!" 대길의 말은 들은 태하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언년이의 부축을 받으며 현장을 벗어납니다.


대길의 마음이 이러했으니 죽음의 순간 허공을 잡으려고 했던 것은 언년이었을 것입니다.  이 때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대길이 말합니다.
"미안하다. 설화야! 세상이 이토록 깜깜하니까 네 마음 한 자락 못 알아주었네! 울지 마라! 니가 울면 내가 진짜 죽는 것 같잖아!"
"알았어! 안 울게. 나 안 울어!"  

"이렇게 좋은 날, 노래나 불러라!"
"뭘로 불러줄까?"
이 순간 대길이 그만 설화의 무릎 위로 꼬꾸라집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설화는 대길의 유언에 따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나알 조옴 보오 소오~
동지 섣다알 꽃 본 듯이 나알 조옴 보오 소오~"    
   
철웅이 좌의정 이경식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뇌성마비환자 이선영(하시은 분)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통한의 눈물을 쏟아내는 그 시각, 설화는 대길의 돌무덤을 만들고는 노래를 부릅니다.



"내 이를 줄 왜 몰랐나, 사랑 사랑 내 사랑아!

나는 죽어 꽃이 되고, 너는 죽어 나비 되어 
푸른 청산 찾아가서 천년 만년 살고 지고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울음을 그친 설화가 대길의 이름이 새겨진 옷을 무덤에 덮고는 이를 어루만지며 흐느껴 울 때 산천도 울고, 초목도 울고, KBS 시청자도 모두 울었습니다. 설화! 드라마 <추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졌습니다. 최후의 영웅은 오직 사랑하는 언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 대길, 노비당의 일원으로 공공의 적 3인방(변절자 조선비, 야비한 그분, 악의 축인 좌의정 이경식)을 쏘아 통쾌한 복수를 한 업복이(공형진 분)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온 누리를 슬픔에 잠기게 만든 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설화입니다. 혹자는 설화는 시종일관 노래만 부르다가 끝났다고 혹평했지만 그녀의 노래에는 여러 사내들의 노리개 감으로 한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낸 여인이 비로소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며 그를 애타게 그리는 그리움이 묻어 있습니다. 설화, 그녀는 오늘날까지도 대길이라는 한 남자를 가슴에 품은 채 구성진 노래를 부르며 우리와 함께 살아 숨쉬고 있을 것입니다.


☞ 드라마 <추노>가 지난주 종영되었습니다. 매주 수·목요일 밤 사람들을 TV 앞으로 유혹하였던 나날을 회상하며 설화의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준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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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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