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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英陵, 세종대왕릉)과 영릉(寧陵, 효종대왕릉)

pennpenn 2025. 6. 16.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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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대왕릉의 홍살문

 

세종대왕릉의 능침구역

 

 

 

 

 

우리는 일반적으로 여주 영릉을 세종대왕의 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곳에는 영릉이라는 이름의 왕릉이 두 군데 있습니다. 다만 한자표기가 다릅니다.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변도리 소재 여주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입니다. 이곳은 조선왕조 역사상 최초의 합장릉으로 동분이실(同墳異室)의 형태이며 이는 하나의 봉분 아래에 2개의 실(室)을 구성한 능(陵)을 말합니다.

 

세종대왕릉과 이웃한 곳(세종대왕면 왕대리 소재)의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왕비인 인선왕후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왕과 왕후의 봉문을 위쪽과 아래쪽에 조성)이 있어 두 묘역을 합쳐 영녕릉(英寧陵)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묘역전체가 하나의 사적(195호)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여주여행관광안내서에는 영릉(英陵, 세종대왕릉)과 영릉(寧陵, 효종대왕릉)으로 표기하고 있기에 필자도 이를 따라 글의 제목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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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여주 영릉을 답사할 경우 세종대왕릉만 찾게 되며 필자도 오래 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주의 역사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전문가(김춘석 전 여주시장)의 안내로 효종대왕릉을 먼저 찾았습니다. 효종대왕릉은 세종대왕릉의 북쪽 약 700m 거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효종대왕릉의 주차장에는 두 왕릉의 배치도 및 안내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매표소를 지나 재실로 가는 길목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마치 잘 조성된 공원에 들어온 느낌입니다. 왕릉의 재실은 평시에는 능을 관리하는 참봉이 머무르는 곳으로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머물며 제례를 준비하는 곳입니다. 조선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원형이 훼손되어 복원한 것이지만 이곳 효종의 영릉재실은 유일하게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왕릉 배치도

 

 

매표소

 

 

 

 

연지

 

재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회양목이 있는데 회양목은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열리는 사철 푸른 나무입니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이지만 이와 같이 재실 내에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노거수 일 뿐만 아니라 1673년에 조성한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여 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서 그 유래 및 역사성이 매우 깊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천연기념물 회양목

 

 

 

 

 

 

재실을 지나 홍살문을 통과합니다. 정자각의 좌우에는 수라간(제례음식 준비)과 수복방(능지기 거처)이 있지요. 향도와 어도로 이어진 정자각(丁字閣)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입니다. 정자각 뒤에는 능침구역인데 효종의 능은 위쪽에, 인선왕후의 능은 아래쪽에 조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자각과 비각 사이로 인선왕후의 능이 보이네요.

효종대왕릉의 홍살문

 

 

정자각

 

 

 

효종의 능(위쪽)과 인선왕후의 능(아래쪽)

 

효종의 능

 

인선왕후의 능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은 인조의 차남으로 태어나 1626년 봉림대군으로 봉해졌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의 패배로 이듬해 소현세자와 하께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가 9년간 살았습니다. 1645년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봉림대군도 귀국해 왕세자로 책봉된 후 1649년 왕위에 올랐습니다. 효종은 재위기간 동안 청나라에 복수하고자 북벌계획을 세웠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자료/국가유산청 홈페이지)

 

 

 

 

홍살문으로 다시 나오면 남쪽의 세종대왕릉과 이어지는 왕의 숲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효종대왕릉과 세종대왕릉을 연결하는 산책길로 거리는 약 700m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88년 숙종, 1730년 영조, 1779년 정조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영릉(寧陵)을 먼저 참배한 후 영릉(英陵)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있어 후손들은 이 길을 걸으며 왕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답니다.

 

왕의 숲길

 

 

 

 

 

세종대왕릉으로 오니 답사를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 창제, 측우기 및 해시계 등 과학기구 발명, 아악 정리, 북방의 야인 정벌로 국토 확장,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또 학문을 충정하여 학자를 양성하고 활자를 개량하여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이 왕릉은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능의 하나입니다.

세종대왕릉 정자각

 

 

 

 

정자각에서 홍살문으로 이어지는 향도와 어도

 

 

 

 

 

정자각 우측에는 비각이 있는데 비문 정면에는 “朝鮮國 世宗大王英陵 昭憲王后祔左(조선국 세종대왕영릉 소헌왕후부좌)"라고 적혀 있는데, 부좌(祔左)는 남편과 아내를 합장할 때 아내를 남편의 왼편에 묻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정자각의 좌측으로 돌아가면 능침공간으로 올라 관람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왕릉이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능침공간의 접근을 금지하고 있지만 세종이 워낙 위대한 성군이어서인지 접근을 허용한 게 다행한 일입니다. 능에는 무인석, 무인석, 장명석(석등), 망주석(능 좌우의 기둥), 석호(돌로 만든 호랑이), 석양(돌 양), 석마(돌 말), 곡장(능 보호용 담장) 등 각종 석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비각

 

비석의  비문(정면)

 

 

세종대욍릉 가는 길

 

 

 

 

 

 

능침에서 본 정자각

 

 

 

 

 

세종대왕릉의 능침구간을 관람한 후 왕의 길로 되돌아가 효종대왕릉 주차장으로 갑니다. 세종대왕릉 정문 쪽으로 가면 대왕의 발명품인 해시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등 각종 과학기구를 복원해 놓고 있으며 세종전(世宗殿)에는 대왕의 업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유물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학술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군요.

세종대왕과 소원왕후 합장릉(자료/국가유산청 홈페이지)

 

 



<참고자료> 세종대왕릉 조성 비화(출처/나무위키)

원래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헌릉 근처(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묻히고 싶어해 먼저 세상을 뜬 소헌왕후를 태종의 능역 서북쪽에 장사지냈고, 본인이 승하한 후에는 그곳에 합장되었다. 그런데 세종의 수릉(壽陵,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정해놓은 무덤)을 정할 당시 당대의 풍수가로 이름난 최양선이 이 묏자리를 두고 ''여기는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절사손장자)라고 반대해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정인지 등이 헛소리로 치부하며 “이런 요망한 소리를 하는 자는 처단하소서!”라고 상소했지만 세종은 그냥 자신을 향한 충언 정도로 받아들이며 기분 좋게 넘어갔다.

그렇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최양선이 주장했던 것처럼 세종의 장남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했고, 문종의 장남 단종 또한 계유정난 이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와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도 요절, 세조 또한 말년에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승하했다. 이 때문에 예종은 할아버지 내외를 여주로 이장해서 오늘날에 이른다.

당시 영릉 자리에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무덤이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무덤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예종의 청을 받아들인 이인손의 후손들이 묘를 파자 “이 자리에서 연을 높이 날린 다음 줄을 끊어 연이 떨어지는 자리로 이장하라.”는 지석이 나왔고 후손들이 이를 따르자 연이 떨어진 자리도 명당이어서 가문이 계속 번창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장으로도 왕실의 장자 수난은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왕실의 장자 수난은 숙종을 제외하고는 정말 유난히 심한 편이었다.

영릉 이장은 세조 때부터 정식 논의되다 1469년(예종 원년)에 천장하여 현재 자리로 옮겼는데, 이 자리가 천하의 대명당으로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아주 대단한 자리이다.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과 더불어 3대 명당으로 손꼽히는 자리로, 일설에는 세종 같은 성인(聖人)을 이러한 대명당에 모셨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수명이 최소 100여 년은 연장되었다는 소위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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