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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 아니 전하! 나으리께서 전하이시라고요? 방금 전하께서 저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전 지금쯤 중국 사신단에 잡혀 고초를 겪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성부 판관이라면서 저를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해주신 나으리가 하늘보다도 더욱 지체가 높으신 전하라니 이게 꿈입니까? 아니면 생시입니까? 앞으로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지금 지난날을 곰곰 생각해 보니 나으리가 임금을 입에 올린 일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맨 처음 악당들을 만났을 때 서투르게 칼을 휘두르면서 저를 피하게 하셨지요? 제가 깜짝 놀라자 "어명!"이라고 나직이 소리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악당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이 나라의 왕이다!" 


그런데 군사들이 나타나 위기를 모면한 후 제가 말했지요? 방금 이 군사들은 한성부 군사가 아니라 포도청군사라고요? 그랬더니 "뭐? 그들이나 저들이나 다 내 군사이기는 마찬가지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장악원 나으리들이 임금님의 큰상을 바라고 있다는 제 말에 나으리께서는 "전하를 대신해서 내가 상을 내리겠다는 말이다. 가자, 전하께서 주신 거나 내가 주는 거나 다 그게 그거다!"라고 웃으며 말씀했고요.

그리고 장악원 나으리들과 함께 술을 드시면서 "내 특별히 어주를 하사하지!"라고 하셨으며, 제가 전하께서 그렇게 미남자이시냐고 묻자 "하하하. 그걸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하겠느냐?"고 파안대소하셨습니다. 궁으로 들어가야 할 때 방금 금군들이 지키고 있는 문으로 저를 데리고 가시기에 제가 당황해 하자 "내가 다 보내버렸다!"라고 능청을 떠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저는 바보처럼 전하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게 어찌 제 잘못이란 말입니까? 왜 임금님께서 그걸 숨기시고 저를 이토록 당황하게 만드십니까? 왜 한성부 판관나으리라고 하셨는지 말입니다. 아니, 그런데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요? 제가 그 날 임금님의 등을 밟고 궁궐 담을 넘은 것 말입니다. 장악원 노비인 제가 감히 전하의 등을 밟았으니 이제 저는 죽은목숨이지요. 제가 오늘날까지 어찌 살아왔는데 여기서 죽다니 너무 억울합니다.

장악원 악장 황주식과 악공 영달나으리도 처음에는 나으리가 임금이라는 제 말을 도저히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 날 나으리와 술을 함께 마시면서 술 취한 전하의 팔을 잡고 저자거리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결국 사실을 알고는 놀라 까무라쳤습니다. 특히 영달은 전하께 벌주를 마시게 하고 안주를 강제로 입으로 넣어드렸거든요. 그리고 악장도 나으리를 부축하고 걸으며 전하의 가슴을 툭툭 쳤지요.


이렇게 장악원 나으리들과 정신 없이 전하에게 했던 불충을 떠올리고 있는 데 전하께서 절 찾으셨지요? 저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자거리나 궁에서 전하를 뵈올 때는 그냥 보통 사람 같았는데 왜 이다지도 절차가 복잡 한가요? 화장을 다시 하고 옷도 새로 갈아입는 등 정신이 하나도 없었답니다.

전하를 뵈오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발걸음이 어찌 옮겨지는 지도 모르고 임금님의 처소로 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불러야 하는지요? 임금님? 주상전하? 상감마마? 적당한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데 내관이 나와 안으로 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방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전하께 들어오셔서는 좌정하시고 저에게 앉으라고 권하셨지요. 저는 전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마마!"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이러 수가! 제가 잘 못 말했습니다. "주상전하!" "상감마마!" 제 말을 들은 전하께서는 푸우~하고 웃으셨지요? "저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전하께서 임금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전 전하가 정말 판관나으리인줄 알았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전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그런데 전하께선 껄껄 웃으시며 제가 주상마마라고 한 말을 트집잡으셨지요? 그게 어디 웃을 일입니까? 제 실수가 그리도 통쾌하십니까? 저는 전하가 하신 말씀에 귀를 의심했습니다. "널 보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걱정이 많았는데, 주상마마라니, 역시 풍산이 너로구나! 이렇게 날 먼저 웃게 만드니 말이야!" 그러면서 그렇게 얼어 있지 말고 고개를 들라고 하셨지요.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할 사람은 오히려 전하라고 하시면서요. 제가 이러고 있으면 전하께서 무안하시다고요.


아니 그러면, 저를 벌주기 위해 부른 게 아니란 말씀이로군요. 임금이라는 것을 숨기고 판관이라고 속인 것은 바로 전하라고 하시면서요. 오래 전부터 이 사실을 저에게 고백(?)하려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기분이 상했더라고 마음을 풀라고 하셨지요. 제가 감히 어찌 기분이 상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전하께옵서는 한 술 더 떠시는 군요. "난 네가 왜 '저에게 풍을 치시느냐'고 물으며 나를 때릴지 걱정을 했다!" 전하, 이게 무슨 망극한 말씀이란 말입니까? 제가 감히 전하를 때리다니요? 그런데 전하께서는 끝내 제 속을 뒤집는 군요! "아니, 임금의 등도 밟는 아이인데 뭔들 못하겠느냐?"고 하셨지요. 아니 저더러 그냥 죽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제가 전하가 임금인줄 모르고 한 일이었고 그 때문에 죽은목숨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확인까지 하시다니요. 너무 잔인하십니다.

그런데 다음 말씀에 귀를 의심했습니다. 여전히 임금인줄 모르는 것처럼 해달라고요! 그리면 제가 앞으로도 전하의 손을 함부로 잡고 그냥 판관나으리처럼 편히 대해도 되는 지요. 왕으로 여기지 말고요. 지금껏 전하께서 신분을 속인 것은 제가 이렇게 벌벌 떨며 놀라워하고 불편한 왕으로 대할까봐 그러셨대요. 더욱이 "어쩐지 내가 너하고 있을 때 만큼은 한 나라의 왕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고 싶다"고 하신 말씀이 제 폐부를 찌릅니다. 전하께서 저를 풍산이라고 부르듯 저도 전하를 한성부 판관이라고 생각하라고요? 제가 감히 어찌 그리 하겠나이까? 그런데 그리 해야하는 것이 어명이라고 하셨나이다. 그러고는 제가 고개를 들자 전하께옵서도 웃으시며 저를 빤히 쳐다보셨지요? 전하, 어쩌려고 저한테 이러십니까? 설마 저를 가지고 노시다가 나중에 쓰레기통에 버리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세상에! 나라의 임금이 저를 이렇게 보살펴 주시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요.


그런데 제가 모화원에서 훔쳐 가지고 온 물건을 가지고 포도청에서 청나라 사신의 무기밀거래 증거를 확보했는데, 이를 계기로 청나라 사신인 김윤달이 자진한 일과 관련하여 중국의 태감은 모화원을 잠입한 저를 중국 측에 인도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지요? 청나라의 신하가 조선 땅에 와서 누명을 쓰고 자결을 했다면서요. 유서까지 보여주었으니 전하의 상심이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전하는 이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으셨지요. 이런 일이 발생하자 청나라와의 불편한 관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조정대신들도 모두 이를 저를 청국에 인도하는 것을 윤허하도록 주청드리고 있는데, 오직 전하만이 완강하게 반대한다고 들었습니다. 궁녀도 조선의 백성이고 또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절대로 사지로 보낼 수 없다고요.


저는 자초지종을 알고 싶어 포도청 종사관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종사관과 감찰부의 정상궁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만약 이번 사신단이 제 날짜에 귀국하지 않으면 심양에 있는 청국 군사들이 조선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며, 모화관의 태감은 이번 일을 트집잡아 조선에 본보기를 보여 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너무 커져 버려 전하께서도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차천수 오라버니가 밤에 몰래 도망치자고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저는 끝내 오빠 말을 듣지 않고 편지를 남긴 채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전하를 모시는 궁녀가 사사롭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궁을 도망치는 게 이치에도 맞지 않고, 또 그동안 저에게 너무나도 잘 대해준 전하께 불충을 저지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 중국 사신단이 묵고있는 모화관으로 갔습니다.


전하! 이제 저는 중국 사신단 앞에 섰습니다. 제가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태감은 제가 중국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될 것이라는 군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겨야하겠지요. 제가 어떤 고초를 겪더라도 제가 나섬으로서 전하의 나라가 안정되고 조정이 평온해 진다면 전 그것으로 궁녀로서의 할 일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지금까지 전하께서 불초 소인에게 베푸신 그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천지신명이 보살펴 주어서 다시 전하를 뵈올 수 있다면 오늘의 불충을 백배 사죄하겠나이다. 부디 옥체를 잘 보존하소서! 전하!                 - 감찰부 궁녀 동이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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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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