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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족의 무덤은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 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합니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영휘원과 숭인원도 조선왕족의 무덤입니다.
<영휘원>은 조선 제26대 고종의 후궁으로 의민황태자의 생모인
순헌황귀비(1854-1911) 엄씨의 무덤입니다.

이웃한 <숭인원>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아들
이진(1921-1922)의 무덤입니다.
불과 1년 간 생존한 아이에게 황태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토록 웅장한 무덤을 조성한 것을 보면 비록 일제치하였으나
장례문화에 대한 조선왕실의 법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영휘원


매표소를 지나 사적 제361호인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영휘원, 우측에 숭인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영휘원>의 경우 홍살문을 지나면 신도와 어도가 있고,
정자각 우측에는 비각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왕릉의 비각은 문이 열려 있지만
이곳의 비각은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게 이채롭습니다.
무덤공간으로는 접근이 제한되어 있더군요.


 


 


 


 


 

 정자각


 


 

 비각


 

 무덤공간
 


우측 <숭인원>의 경우 정자각 보수공사로 인해 가림막이 쳐져 있고
출입제한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다만 무덤공간을 올려다보면 석물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공간적인 개념인 상설(象設)은 영휘원과 유사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영휘원과 숭인원은 조선왕릉은 아니어서
세계문화유산에는 등재되지 아니하였지만
조선왕릉에 준해 문화재청 중부지구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웃에는 세종대왕기념관과 홍릉수목원이 있어

역사유적을 찾아보고 산책을 할 수 있는 좋은 나들이길이 될 것입니다.
(2013. 8. 4)

 

《영휘원과 숭인원》

사적 제361호. 지정면적 5만 5015㎡. 한 묘역 안에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다. 이곳에는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이 있었다. 1919년 고종이 죽었을 때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남양주시 금곡동)로 천장(遷葬 : 묘를 옮김.)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곳은 ‘홍릉’이라 불리고 있다.

영휘원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사친(私親)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소(園所 : 왕가 산소의 다른 이름)이다. 순헌귀비는 증찬성 진삼(鎭三)의 딸로 1854년(철종 5)에 태어나 1859년에 입궁해 민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당하자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종을 시봉(侍奉)하였으며, 1897년 영왕을 낳고 1903년 귀비로 책봉되었다.

엄귀비는 양정의숙ㆍ진명여학교ㆍ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참여하는 등 근대 여성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911년 7월에 죽었다. 같은 해 8월에 안장하고 원호(園號)를 영휘라고 하였으며, 위패는 덕수궁 영복당(永福堂)에 봉안되었다가 경복궁 서북측에 있는 칠궁(七宮)으로 이안(移安)되었다.

숭인원은 영친왕과 이방자(李方子) 사이에서 태어난 진(晋)의 원소이다. 진은 1921년 8월에 태어나 그 이듬해 5월에 죽었다.

두 원의 묘역시설로는 곡장(曲牆 : 무덤 뒤에 둘러싼 작은 담)ㆍ상설(象設, 石虎ㆍ石馬)ㆍ혼유석(魂遊石)ㆍ장명등(長明燈)ㆍ망주석(望柱石)ㆍ문인석(文人石)ㆍ무인석(武人石)ㆍ석마(石馬)ㆍ홍살문(紅箭門)ㆍ정자각(丁字閣)ㆍ비각(碑閣)ㆍ제실(祭室)ㆍ우물[靈泉]ㆍ사초지(莎草地 : 오래 되거나 허무러진 곳을 떼로 잘 입혀 다듬은 곳) 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담장 밖 북쪽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관(世宗大王紀念事業會館)이 있으며, 구영릉(舊英陵, 서울 서초구 內谷洞 獻仁陵)에서 수습해온 신도비(神道碑)와 능호석(陵護石)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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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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