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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건봉사는 산 이름과는 달리 우리지역인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고성8경 중 제1경입니다. 금강산 건봉사로 부르는 이유는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건봉산 감로봉의 동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 아도화상이 창간한 천년고찰로서 일제 강점기에도 북부 강원도 지역을 대표하는 31본산의 하나로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 낙산사 등을 말사로 거느린 전국 4대 사찰 중의 하나였지만 6.25동란(한국전쟁)으로 전소되면서 조계종에서는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능파교(凌坡橋)는 불이문을 지나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에 걸쳐진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이 다리를 건너면 대웅전과 극락전지역입니다. 능파교는 "능히 파도를 헤치며 극락세상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담겨있으며 사찰에 있는 다리로는 드물게 보물(제1336호)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불이문(우측 아래 능파교가 보임)



능파교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입니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조선 숙종 34년(1708)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의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3년 간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영조 21년(1745)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山映樓)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2005년 10월 일부 해체하여 복원하였습니다. 능파교는 규모가 비교적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다리로,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갖추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 건봉사로 가는 길은 통제되었다가 1988년 작은 출입로가 열렸습니다. 글쓴이는 고성8경 중 제3경인 화진포에서 남하하여 건봉사로 들어갔는데 군부대 검문소를 두 번이나 통과해야 했습니다. 현재 도로공사가 한창이어서 일정구간은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합니다. 남쪽에서 북쪽의 건봉사로 진입하는 길목에도 검문소가 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2013. 11. 23) 

 

[건봉사 개요]
 
신라시대 법흥왕 7년(서기 520년)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원각사(圓覺寺)라 이름하였다. 758년(경덕왕 17)에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 10,000일 동안 염불을 계속하는 모임)를 열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만일회의 시초이다.

그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사찰을 중수(重修)하여 서봉사(西鳳寺)라 개칭하였는데 1358년(공민왕 7)에는 나옹(懶翁)이 사찰을 중수하고 다시 건봉사라고 개칭하였다. 1464년(세조 10)에는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역대 임금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통도사에서 가져간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12과를 임진왜란이 끝나고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찾아와 건봉사에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며 구한말 개화사상과 신문화교육을 위해 봉명학원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아군 5,8,9사단, 미군 10군단과 북한군 5개 사단이 이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때 건봉산지역 전투로 사찰의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으나 1994년 이후 점차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옛 절터와 대웅전, 불이문(강원 문화재자료 35), 9층탑을 비롯한 7기의 탑, 48기의 부도(浮屠), 31기의 비석이 있다.(자료/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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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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