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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건봉사는 산 이름과는 달리 우리지역인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고성8경 중 제1경입니다. 금강산 건봉사로 부르는 이유는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건봉산 감로봉의 동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 아도화상이 창간한 천년고찰로서 일제 강점기에도 북부 강원도 지역을 대표하는 31본산의 하나로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 낙산사 등을 말사로 거느린 전국 4대 사찰 중의 하나였지만 6.25동란(한국전쟁)으로 전소되면서 조계종에서는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건봉사 대웅전으로 진입하는 능파교를 건너면 대석단이 보이고 중앙통로(中央通路) 좌우(左右)로 높이 1m58cm의 사각형(四各形) 석주 2기가 우뚝 서있습니다. 이것이 십바라밀(十波羅蜜)석주(石柱)로, 이는 대승불교의 기본수행법을 표현하고 시각적인 효과를 지닌 것으로 비록 1920년대에 조성하여 연대는 일천하지만 국내에선 보기 드문 중요한 사찰문화재입니다. 

 능파교 뒤로 보이는 십바라밀 석주



이중 좌측석주 전면엔 원월(圓月), 신날, 구름, 좌우쌍정(左右雙晶), 고려두테의 형을 취한 것이 있으며, 우측석주엔 반원(半月), 가위, 금강저(金剛杵), 전후쌍정(前後雙晶), 성중원월(星中圓月)형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좌측석주

 우측석주



이와 같이 석주의 십바라밀 도형(圖形)에는 대승불교의 기본수행법인 보시(波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6바라밀에다 이를 보조하는 방편(方便), 원(願), 력(力), 지(知)의 4바라밀을 첨가해 구성한 것으로 십바라밀도는 이들 열 가지 수행의 방법을 상징화하여 나타낸 것으로 그 하나 하나에는 깊은 의미가 간직되어 있습니다.

건봉사는 십바리밀 석주에 음각된 내용들은 재물과 진리와 두려움을 없애주는 3종의 보시를 베풀고 보름달 같은 광명이 두루 비치고, 계율을 지켜 그릇됨과 악한 것을 방지하고 선행을 쌓아 어둠을 감하고 밝음을 더욱 자라게 하며 또한, 욕됨을 참고 마음을 한곳에 모아 깊은 삼매(三昧)을 이루게 되면 모든 열기와 번뇌가 소멸되어 청량을 얻게 된다는 선정바라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혜로써 피안(彼岸)에 도달하는 것은 마치 견고함과 예리함과 밝음의 세 가지 특성을 함께 갖춘 것이며, 두 우물을 나누어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듯이 중생을 교화하여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며 어떤 신분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불교에 귀의하여 해탈하는 것, 수행할 때 힘을 투입하면 집중력이 생겨서 올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력(力)바라밀 그리고 삼계(三戒)와 삼세(三世)의 세간적인 지식을 세 개의 조그마한 원으로 표시하고 불교의 정지(正智)를 바깥의 원으로 표현하여 곧 변지와 정지를 함께 갖추어서 지혜를 올바르게 성취하는 것을 나타낸 불도정진에 거울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십바라밀 석주 안내문


이처럼 십바라밀 석주가 건봉사지에만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것은 거집읍 초계리에 거주하던 고(故) 이백규(李白圭, 85세, 前문화원이사)옹이 관내 중요불교문화재 자료수집을 위해 국립도서관에서 옛 문헌을 찾아 열람하다 발견하게 됐다고 합니다.(자료 한국지역진흥재단 홈페이지)

☞ 건봉사로 가는 길은 통제되었다가 1988년 작은 출입로가 열렸습니다. 글쓴이는 고성8경 중 제3경인 화진포에서 남하하여 건봉사로 들어갔는데 군부대 검문소를 두 번이나 통과해야 했습니다. 현재 도로공사가 한창이어서 일정구간은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합니다. 남쪽에서 북쪽의 건봉사로 진입하는 길목에도 검문소가 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2013. 11. 23) 

[건봉사 개요]
 
신라시대 법흥왕 7년(서기 520년)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원각사(圓覺寺)라 이름하였다. 758년(경덕왕 17)에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 10,000일 동안 염불을 계속하는 모임)를 열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만일회의 시초이다.

그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사찰을 중수(重修)하여 서봉사(西鳳寺)라 개칭하였는데 1358년(공민왕 7)에는 나옹(懶翁)이 사찰을 중수하고 다시 건봉사라고 개칭하였다. 1464년(세조 10)에는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역대 임금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통도사에서 가져간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12과를 임진왜란이 끝나고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찾아와 건봉사에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며 구한말 개화사상과 신문화교육을 위해 봉명학원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아군 5,8,9사단, 미군 10군단과 북한군 5개 사단이 이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때 건봉산지역 전투로 사찰의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으나 1994년 이후 점차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옛 절터와 대웅전, 불이문(강원 문화재자료 35), 9층탑을 비롯한 7기의 탑, 48기의 부도(浮屠), 31기의 비석이 있다.(자료/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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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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