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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수원화성을 세운 정조대왕일 것입니다.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에 위치한 융건릉은 융릉과 건릉을 말합니다.
융릉(融陵)은 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 홍씨의 능이고,
건릉(健陵)은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입니다.

 

 

 

 

 

 

 

 

재실

 

 

 

융릉에는 소나무가 군락을 지어 자라고 있는 반면
건릉에는 참나무가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습니다.

 

 

 

 

참나무 시들음병 퇴치모습 

 

 


 

정조는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로
즉위직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문무를 겸비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연구에 힘쓰고
장용영 설치와 수원화성을 쌓는 등 국방에도 심혈을 기울이었습니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장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힘썼습니다.

 

효의왕후는 김시묵의 딸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극히 모셔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정조 즉위 후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건릉도 융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넓은 참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홍살문 뒤의 참도는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길로
신도와 어도로 나뉘어 집니다.


거의 모든 조선 왕릉의 참도는 홍살문 뒤 중앙부에 조성되어 있는데 비해
건릉의 참도는 매우 넓습니다.

 

 

 

 

 

 

 

 

 

넓은 참도

 

 


정자각 좌우로 수라간 및 비각이 있으며 능침은 부부합장릉입니다.
능침구간은 출입제한으로 접근할 수 없군요.

 

 

 

 

 정자각에서 바라본 홍살문

 

 

 

 

 

 

 

 능침공간

 

 

 

 
윤건릉은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더군요.


아마도 수원 화성을 건립한 정조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대변하는 듯 보여집니다.

(2014. 7. 5)
   

 향나무

 

수령 140년의 향나무

 

 

 

조선 정조대왕(1752-1800)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하였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체제를 구축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벽파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노론이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노론, 특히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김종수,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기간 중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음으로써 세도정치의 씨를 뿌렸다. 박지원 등의 진보적 문장에 반대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켰고, 서인의 성리학자이자 예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존경하여 그를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 가는 길 : 수도권전철 병점역 2번 출구로 나와 34번, 34-1번, 46번
또는 35-1번 버스를 타고 융건릉에서 하차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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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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