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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월릉면 덕은리 소재 용주서원(龍州書院)은
조선중기의 유학자이며 청백리인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31년(1598) 설립한 사원입니다.

 

백인걸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방 유림들이 선생이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던 옛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셨습니다.  

 

그 뒤 유생 정재심(鄭在心)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철폐되었으며,
그 자리에 정조 24년(1800)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였습니다.

 

1924년 유생 50여 명이 뜻을 모아 서원을 복원하고,
김행(金行)·조감(趙堪)·신제현(愼齊賢)·백유함(白惟咸)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경내 건물로는 6칸의 사우(祠宇), 내신문(內神門), 동서 협문(夾門),
3칸의 정륜당(正倫堂), 외신문(外神門) 등이 있습니다.

 

강당인 정륜당은 2칸의 마루와 1칸의 온돌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서원에는 매년  9월 9일 파주유림에서 제향을 올립니다.
(자료 : 민족문화백과사전 및 현지 안내문 발췌)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두에 외신문이 보입니다.
출입문은 잠겨 있지만 좌측으로 돌아가면 경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홍살뭉 뒤로 보이는 용주서원

 

 

 

 

 

 

 

 

외신문 뒤에는 정륜당과 협문이 있고,
내신문 안에는 사우가 있는데 사우는 잘 볼 수 없습니다.
약 200년이 지난 유허비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지방을 다니다 보면 향교는 자주 보지만
서원은 안동 도산서원(이퇴계를 기리는 서원)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외신문과 정륜당

 

 

 

 

 유허비와 사우

 

 

 

 

 

 내신문

 

 

 

휴암 백인걸의 생애

 

휴암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사림파 정치인이며 성리학자, 작가이다. 정암 조광조, 모재 김안국, 김식(金湜)의 문인이며,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은 그의 문하생이었다. 조광조와 김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기묘사화로 스승과 동료를 모두 잃고 실의 속에 금강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뒤에 김안국을 찾아가 그로부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537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근무하다가 출사하였으나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반대하였으며, 그의 밀지 정치를 비난하다가 파직당했다. 그 뒤 을사사화 등으로 출사하지 않다가 1547년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그 뒤 윤원형의 몰락 이후 출사하여 1567년(명종 22) 70세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그 뒤 이조참판, 사간원대사간, 대사헌, 공조참판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을 지내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했다.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의 한사람으로 녹선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학문에 정진하여 후일 대학자가 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하에 배출하였다. (자료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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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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