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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환수한 문인석

 

 

 

서울 성북구 성북동 소재 우리옛돌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석조유물 전문박물관으로서

수복강녕과 길상을 기원하는 박물관입니다.

우리옛돌박물관의 전신은 경기도 용인에서 개관(2000년)한 세중옛돌박물관입니다.

 2015년 문을 연 현 박물관의 부지면적은 5,500평 규모로 실내전시관과 야외전시관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실내전시관도 연면적 1,000평에 달할 정도입니다. 이곳에는 석조유물 1,250점,

자수 280여점, 근현대회화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문화재를 비롯해 문인석, 장군석, 동자석,

벅수, 석탑, 불상 등 다양한 돌조각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숨결과 삶의 애환을 담긴 돌조각의 예술적 가치를 조명하는 우리옛돌박물관은

석조유물 뿐만 아니라 규방문화의 결정체인 전통 자수작품 및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작가의 회화작품도 함께 전시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명실상부한 종합예술의 공간입니다.

 

실내전시관은 환수유물관(1층), 동자관과 벅수관 및 자수관(2층), 기획전시관(3층)이 있고

야외에는 문인석.무인석, 장명등, 불상, 부도, 장승석, 제주도의 돌 등 돌에 관련한 갖가지의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을 한꺼번에 소개하기는 아쉬워 실내전시관 중 환수유물관과 동자관 및 벅수관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박물관 입구에 도착하면 3층 규모의 현대식 석조박물관 규모에 놀라게 됩니다.

매표소 앞에 도열해 있는 옛돌들은 모두 역사의 온기를 품고 있는 소중한 유물들입니다.

1층 안으로 들어서면 여기저기에 교과서에서 봄직한 돌들이 놓여 있네요.

이곳에는 전문 해설가가 상주하고 있어 원하면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옛돌박물관 외관

 

 

 

     야외전시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옛돌들

 

 

 

     도슨트(전문해설가)의 설명을 듣고 있는 방문객들   

 

 

      매표소의 유물들

 

 

 

 

“환수유물관”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문인석 47점이 전시된 공간입니다.

문인석은 장군석,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조각으로

천 년간 능묘를 지켜온 문인석은 일제치하에서 다수가 일본으로 밀반출되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천신일 이사장(우리옛돌박물관)은 잃어버린 문화재를 되찾아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려는 집념으로 해외로 흩어진 문화재 환수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다가 많은 석조유물을 소장한 일본인(쿠사카 마모루) 소식을 듣고

여러 차례 방일해 그를 설득한 결과 그의 소장품 중

상태가 양호한 문인석과 장군석, 동자석 등 70점을 환수하게 되었습니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면 불이 자동으로 켜지지만 그 분위기는 어둡고 경건해 보입니다.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전시된 석상을 보노라면 마치 중국 서안에서 발견된

진시황의 병마용 전시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듭니다.

 

 

 

 

 

 

 

 

​문인석이 손에 쥐고 있는 물건으로 홀(笏)이라고 하는 데,

이는 신하가 왕을 알현할 때 왕에게 아뢸 말씀,

혹은 왕이 하시는 말씀을 붓글씨로 메모하기위한 물건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메모용으로 손에 들었지만, 나중에는 의례적으로 손에 갖추어 들게 되었으며.

조선시대 법에 따르면 1품-4품의 신하는 상아로 만든 홀을,

 5품-9품의 신하는 나무로 만든 홀을 들었다고 합니다.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오릅니다.

2층에는 모두 5구역이 있는데 능묘를 지키는 고려후기의 장군석은 갑옷을 입고

 칼을 찬 모습이 매우 근엄해 보입니다.

또 깨달음을 이루어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 만한 성자인 작은 나한상도 여럿 보입니다.

      2층 전시공간

 

 

                                                                             고려후기 장군석

 

 

                                                                              조선후기 나한상

 

 

 

 

 

먼저 “동자관”을 살펴보겠습니다.

동자(童子)는 도교에서는 신선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불교에서는 부처님이나 보살을 곁에서 모시며,

유교에서는 무덤 주인의 심부름을 하는 아이입니다.

 

 

 

 

 

 

 

 

 

 

동자석은 16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왕실가족과 사대부 묘역에 조성된 석물입니다.

 

동자석은 도교, 불교, 유교, 무속신앙 등 여러 요소들이 혼재되어 다채로운 형태를 지니며

그 역할 또한 무덤의 수호신, 마을의 지킴이 등으로 매우 다양합니다. ​

이곳에는 동자석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도 함께 전시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벅수관”입니다. 벅수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장승을 부르는 순우리말입니다.

장승은 목장승(나무)과 돌장승(석물)의 두 가지가 있는데,

목장승은 비바람에 쉽게 썩어 주기적으로 교체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원래의 모습에 다소 변화가 생길 수 있으나,

돌장승은 한번 세우면 반영구적으로 전승되었습니다.

벅수관의 전시주제는 "한국인의 얼굴, 희로애락을 노래하다"로군요.

 

 

 

 

 

 

 

사람의 얼굴모습을 한 장승을 마을입구에 세워두면 전염병을 가져오는

역신이나 잡귀들이 겁을 먹고 마을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믿었으며,

화를 막고 복을 가져다주는 신비스러운 힘이 있다고 여겨

사람들은 마을의 벅수에게 여러 가지 소원을 정성스레 빌었습니다.

 

따라서 벅수는 우리 민초들의 삶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석조물이며,

그들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얼굴에 새겨져 천진하고도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 환수유물(문인석), 동자석 및 벅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서 동자석과 벅수는 생긴 모습이

 상당히 유사해 잘 구분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실 이를 구분할 필요는 없겠지요.

동자석은 무덤에, 벅수는 동네어귀에 세운다는 것만 알고 있어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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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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