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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진안군 진안읍·상전면과 장수군 천천면 경계를 이루는 천반산(647m)은 주능선 일원이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설과, 땅에는 천반, 지반, 인반 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는데 이 산에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해서 지어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 산 남쪽 마을 앞 강가에는 장독바위가 있어, 이 바위가 하늘의 소반에서 떨어진 복숭아(천반락도 天盤落桃)라 하여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을 천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천반산은 사방이 깎아지른 험준한 절벽으로 에워싸여 있습니다. 여기에다 북으로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용담호 남동쪽 끝 구량천이 산자락을 휘감고 있으며, 서쪽과 남으로는 금강 상류를 이루는 연평천(일명 장수천)이 휘돌아 흐르고 있어 천혜의 요새를 방불케하는 산세를 이루고 있습니다.(자료 : 한국의 산천).

산행들머리는 진안군 진안읍 가막리 가막교입니다. 교량 입구에는 용담댐 유역 하천도와 천반산 등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습니다. 교량 위에 서니 금강 변에 우뚝 선 기암과 고만고만한 산들이 강물에 반사되어 수묵화 같은 풍경을 연출합니다.

가막교에서 바라본 금강


다리를 건너면 장수군 천천면입니다. 좌측으로 돌아가니 전형적인 산촌의 농가가 한 채 있는데 당산나무 곁에는 불도저로 길을 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농가의 대청마루에 선 한 촌노가 글쓴이가 맨 후미로 지나가니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기에 서울에서 왔다고 대답합니다. 농가의 뜰에 놓여 있는 큰 장독 몇 개가 유난히 향수를 자아냅니다. 이웃한 감투바위는 무당이 치성을 들이던 곳입니다.

도로공사중인 불도저

민가의 장독대와 감투바위


민가를 돌아 등산로 입구에 서니 "천반산과 정여립"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천반산은 조선 선조 22년(1589년) 전라도를 반역향이라 하여 호남차별의 분수령을 이룬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1546~1589)의 한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정여립은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나 선조 3년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이라는 벼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선조와 서인들의 미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 대동계를 조직하고 모악산 앞 제비산(현재의 김제시 금구면)에 머물면서 죽도에다 시설을 지어놓고 천반산에서 군사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는 "만민은 평등하고, 천하는 군주들의 사유물이 아니라 만백성의 것이다"라는 만민평등사상을 가지고 전주에서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계에 가입시켜 활쏘기 등 군사훈련을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조직을 만들어 대동사상을 전파하였으며,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당시 이를 배격하는 혁신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반대파의 고변을 받았습니다.

정여립은 장차 있을지도 모를 외침에 대비하고자 군사훈련을 했지만 이는 반대파를 자극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입니다. 정여립은 선조 22년 역모로 몰리자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에 쫓겨 이 산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집니다. (자료 :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한편, 천반산 인근 죽도에서 정공을 모시러 왔다는 진안군수의 전갈을 받은 정여립은 장군바위에서 천지신명에게 나라를 굽어살피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를 남긴 뒤 자진 포박되어 억울한 모반으로 1589년 임진왜란발발 3년 전 한 많은 생을 마쳤다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등산로에는 현대식 이정표와 검은 글씨를 새긴 정감이 가는 목판이정표가 있습니다. 통나무 계단 길을 올라 산중턱 삼거리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진 할미굴로 갑니다. 이 굴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좁은 굴이 아니라 큰 바위가 움푹 들어간 모습입니다. 

현대식 이정표

목판 이정표


할미굴은 조선 세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송보생 선생이 세조의 단종 폐위에 항의하여 낙향한 후 천반산에 위치한 송판서굴에 은거하여 수도하면서 내외간의 동침을 금하고자 부인을 이곳에 거처토록 한데서 할미굴이라 이름지어 졌다고 합니다.

할미굴 안내문

할미굴


삼거리 갈림길로 되돌아와 위로 오릅니다. 마침 조망이 터지는 곳에 서니 산행들머리인 가막교와 금강의 물줄기가 하얗게 빛나고 있습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막교와 금강


천반산성 안내문을 보고는 우측의 전망바위로 오릅니다. 한림대터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 올라 서남쪽을 바라보니 마이산의 말의 두 귀가 M자 모양으로 솟아 있어 이정표 역할을 합니다. 이 터는 정여립이 성터와 망루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천반산성

한림대터에서 바라본 마이산


대동계 훈련터 이정표를 지나자 천반산 산성을 알리는 표석이 보입니다. 이곳을 내려와 능선을 가노라니 좌측은 완전히 절벽입니다. 구량천 너머 서북쪽으로는 대덕산(602m)과 고산(876m)이 우뚝합니다.

훈련터

천반산 산성터

능선 조망대서 바라본 구량천


말바위를 지납니다. 바위의 생긴 모습이 말의 잔등 같습니다. 정여립은 이곳에서 친지들과 바둑을 두었다고 합니다.

말 바위


괴송 한 그루가 길손을 맞이하는 바위 조망대에 서니 남쪽으로 지나온 가막교가 내려다보입니다.

괴 송

전망대서 본 가막교


여기서 조금 더 진행하니 천반산 깃대봉 정상(647m)입니다. 정상에는 조그만 표석과 돌무덤이 보입니다. 막상 최고봉에 섰지만 사방은 잡목으로 둘러 쌓여 아무런 조망을 할 수 없습니다. 

천반산 정상


정상을 내려와 낙엽이 푹신한 길을 가니 갈림길 안부입니다. 우측으로 내려서면 바로 하산길이지만 산악회 측에서는 산행시간이 너무 짧다며 맞은 편 능선으로 디귿 자로 돌도록 했습니다.

                                                   낙엽길


그런데 두 번째 송전철탑을 자나자 등산로가 매우 희미해지기 시작합니다. 임도에 도착하여 우측으로 조금 가노라니 좌측의 산 속으로 다시 들어가도록 리본이 걸려 있습니다. 여기서 일행보다 먼저 산 속으로 들어선 게 실수였습니다. 앞 서 간 사람들의 흔적도 희미하고 산악회의 안내리본도 너무 듬성듬성 달려 있어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앞뒤로 동료가 없으니 산 속에서 미아가 될 처지입니다.

송전철탑


거의 길 없는 길을 앞 서 간 사람들이 낙엽을 헤친 흔적을 찾아 겨우 발걸음을 옮깁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거의 흔적마저 보이지 않지만 그냥 감으로 비탈길을 내려오니 공사중인 목장이 반겨줍니다. 고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되려는 순간 그만 비가 내립니다. 일기예보에는 오후 6시경 1mm의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오후 3시가 되기도 전에 제법 옷이 젖을 정도로 비가 옵니다. 붉은 색 지붕의 처마아래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시래기를 보며 종종걸음을 칩니다.

시레기 말리는 광경


다시 가막교에 도착하여 3시간 반 동안의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산에서 걸을 때는 반드시 일행과 함께 할 것과 평소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길은 홀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쳐 준 산행이었습니다.

일개 문신의 몸으로 하늘같은 왕권사상에 도전했던 정여립, 그는 갔지만 그의 흔적은 천반산 곳곳에 남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등산 개요》

△ 등산 일자 : 2008년 12월 17일 (수)
△ 등산 코스 : 가막교-외딴 농가-할미굴-한림대터-성터-말바위-천반산 정상-삼거리-송전철탑
                    -임도-무명능선-동물농장-가막교

△ 소요 시간 : 3시간 35분
△ 산행 안내 : 산악랜드 

                           ☞ 스크랩 안내 : 다음 블로그(http://blog.daum.net/penn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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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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