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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화암의 정자 백화정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소재 부소산성(사적 제5호)은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서기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으며,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습니다.

 

성내에는 사비루, 영일루, 반월루, 고란사, 낙화암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습니다.

 

 

 

 

 

부소산문으로 진입해 안으로 들어서면 깔끔한 이정표가 길손을 맞아합니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낙화암과 고란사는 좌우 어느 방향으로

가도 되지만 좌측으로 가는데 거리가 가깝습니다.

갈림길에서 낙화암까지의 거리는 1.2km로 유유자적하게 숲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도착하게 됩니다.

 부소산문

 

 

 

 

 

 

 

 

 

낙화암은 부소산 북쪽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높이 약 60m 정도의 바위절벽입니다.

즉 백마강의 남쪽 부소산 바위절벽이지요.

낙화암은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백제가 성왕ㆍ위덕왕ㆍ무왕ㆍ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되자

신라는 단독으로 백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워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하였는데

의자왕은 국사를 소홀히 하다가 결국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ㆍ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었고,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가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으니

백제 마지막 순간까지 정조를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서린 곳이 바로 낙화암입니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의 작품입니다.

 

 

 

 

 

그전부터 낙화암과 삼천궁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런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백제의 멸망원인을 의자왕의 방탕과 사치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했던 일부 사가와 문학인들이

궁녀의 숫자를 부풀려 이렇게 불렀다는 게 맞을 것입니다.

여러 명의 궁녀를 후세사람들이 삼천궁녀로 둔갑시키지 않았을까요?

 

 

 

 

 

육각형의 백화정(百花亭)은 1929년 당시 부여군수가

낙화암 위에 지은 정자로 죽은 궁녀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절벽에서 산화한 궁녀를 꽃에 비유한 재치가 빛납니다.

 

 

 

 

 

 

 

 

오늘날 낙화암 아래 백마강에는 유람선과 황포돛대가 유유히 떠다니지만

 백제의 멸망 당시 백마강은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백마강 황포돛대

 

 

 백마강 유람선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

 

 

 

 

 

백마강 아래쪽 강변에는 고란사가 있으며, 부소산 정상(106m)에는 사자루가 있습니다.

사자루는 1919년 세운 2층 누각으로 앞쪽에는 사자루(의친왕 글씨),

뒤쪽에는 백마장강(해강 김규진 글씨)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사비루

 

 

 백마장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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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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