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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길(장혁 분) 도련님, 살아 계셨군요! 살아 계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돌아가신 줄을 알면서도 항상 제 가슴에 품고 살아온 도련님이 이렇게 살아 계시는군요! 지난번 저자거리의 먼발치에서 도련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본능적으로 몸을 잠시 숨겼답니다. 살아 계신 도련님을 본 것이 저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불과 며칠 전 송태하(오지호 분)와 혼인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도련님을 만나는 것이 매우 두려웠습니다. 도련님도 저를 보셨는지 잠시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젊은 여인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비단을 고르셨지요? 저는 도련님을 부를 수도 달려갈 수도 없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살아 계셔서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답니다.

그런 일이 있는 후 도련님은 칼을 든 채 제 임시거처로 나타나셨어요. 그런데 도련님이 저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 한 마디를 듣고는 저는 기절할 뻔하였습니다. "도망노비 따위가 평온할 줄 알았더냐?"고요. 제가 살아온 지난 10년의 세월이 어찌 평온했겠습니까?




저는 도련님께서 그 화마 속에서 살아남은 후 저를 찾았는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비들은 주인에게 질문할 자격이 없다"고 대답하셨지요. 어찌 이런 대답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저는 다시 여쭈었습니다. "혹시 제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였었는지요?"

그런데 도련님의 대답은 제 가슴을 조각조각 찢어 놓고 말았습니다. "어느 미친놈이 너같이 미천한 집안 종년 따위를 마음에 품고 있겠느냐? 반상이 뚜렷하고 주종이 엄격한데 어찌하여 너는 하늘의 뜻을 저버리고 주인인 나를 배신하였느냐?" 이게 무슨 말입니까?




도련님께서는 추운 날씨에 부엌일을 하는 저에게 화로에 달군 따끈따끈한 공깃돌을 주시며 손을 녹이게 하셨고, 짚신 대신 예쁜 꽃신을 신겨 주셨으며, 저를 업고는 나라를 바꿔 양반과 상놈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평생 저와 함께 살고싶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둘의 사랑이 어르신께 발각되었을 때도 도련님은 저와의 혼인을 고집하지 않으셨나이까! 그러니 제가 어찌 도련님을 배신하겠습니까?





어르신은 저를 광에 가두고 굶어죽을 때까지 물 한 모금 주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지요. 오라비인 큰놈이는 어르신께 저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지만 내쳐지고 말았습니다. 오라비는 결국 집에 불을 지르고 어르신 가족을 몰살한 후 도망을 쳤지요. 그래서 도련님도 죽었다고 생각했지요.

제 오라비가 주인인 도련님을 배신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 오라비가 배신자라고 하여 저도 배신자라고 보는 것에 대하여는 억장이 무너집니다. 저는 명안스님의 암자에서 도련님의 극락영생을 빌고 또 빌었습니다. 오라비의 성화에 따라 최사과의 후처로 시집간 첫날밤 저는 집을 뛰쳐나와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을 치면서 불한당의 공격을 받았지만 송태하(오지호 분)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고 암자로 가서 마지막으로 도련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습니다. 그 뒤로는 소복으로 갈아입고 계속 도망을 쳤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 옛날 도련님이 주셨던 사랑과 그리움의 징표인 공깃돌 한 개를 그만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송태하와 제주도까지 다녀오면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에게 마음을 의지하게 되었고 결국 혼례까지 올렸습니다. 만약 도련님이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저는 결코 태하와 혼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죽었다고 생각한 도련님이 귀신처럼 나타나셔서 이렇게 막말을 퍼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지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저도 기가 막혀 "반상이란 누가 만든 거지요? 주종이란 어디서 시작된 것입니까?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려는 것이 진정 하늘의 뜻 아닙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세상에! 한 때는 장래를 약속했던 정인(情人)이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나 이런 고리타분한 대화가 가당치나 한지요?

그런데 도련님은 "아직도 너희들이 사람이라고 생각되느냐? 너희들은 노비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10여 년 전 나라를 바꿔 양반과 상놈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그 포부는 어디로 가고 다시금 이 땅의 지배자인 양반으로 되돌아간 것입니까?

도련님! 그렇게 제 목에 칼을 들어대지만 마시고 반노의 죄로 제 목숨을 얼른 거두기 바랍니다. 도망노비로서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언년이(이다해 분)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도련님을 남자로 생각했고, 화재사건 후 돌아가셨다고 확신하면서도 지난 오랜 세월동안 제 가슴에 품고 있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도련님으로부터 동정을 받을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도련님의 손에 이 모진 목숨을 잃는다면 저로서는 더 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어서 죽어 큰놈이 오라버니 곁으로 하루빨리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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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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