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석굴암(石窟庵)이라고 하면 누구나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을 떠올린다. 글쓴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졸업수학여행을 경주로 가서 석굴암을 방문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당시만 해도 석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999년 대구에서 근무하며 팔공산 북쪽에 제2석굴암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수도권에도 석굴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서울지하철 1호선 회룡역에서 내려 회룡골로 들어섰다.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나무를 지나 시인의 마을(회룡탐방안내소)을 뒤로한다. 조금 가다가 교량을 건너면 약수터가 있는 삼거리이다.

이정표를 보면 좌측으로는 회룡사, 우측은 석굴암으로 간다고 한다. 사전에 석굴암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이 왔지만 석굴암이라는 말에 이끌려 이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오던 길에서 보면 직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차량통행이 가능한 오르막 도로를 터벅터벅 걸어간다. 챙이 긴 모자를 썼지만 햇볕이 비칠 땐 햇살이 따갑다. 능선에 올라서니 "석굴암"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과 큰 바위 두 개의 틈새에 삼각형 모양의 출입구가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석굴암 가는 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석굴암의 석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삼각형 모양의 석문


암석 앞에 세워진 안내문을 읽어보니 이곳에 백범 김구 선생의 필적이 있다고 씌어있다. 이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무학대사와 함께 3년 간 대업경륜을 폈던 곳이며, 또한 백범이 중국상해로 망명하기 전에 한 때 피신했던 곳이라고 한다.

해방 후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귀국한 백범은 이곳에 자주 들러 자연을 즐기며 옛일을 회고했단다.

석굴암입구 거대한 3개의 자연석 위에 새긴 『석굴암 불 무자 중추 유차 백범김구(石窟庵 佛 戊子 仲秋 遊此 白凡 金九)』 명문은 당시 언론인 남상도 외 7인이 선생의 친필을 받고, 이를 오래 기념코자 1949년 3월부터 약 3개월에 걸쳐 조각한 것이다.(자료 현지 안내문). 

이들은 1949년 6월 26일 오후 3시 이곳 석굴암에서 백범을 모시고 명문 완공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마침 그 날 선생이 암살을 당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돌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니 왼쪽에는 보월당이 있고, 오른쪽 거대한 세 개의 바위 사이에 석굴이 있다. 이 자연적인 석굴 안에 부처님상이 놓여 있다. 석굴을 감싸고 있는 큰 바위 사면에 김구 선생의 친필 조각이 잘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월당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석굴암과 김구의 글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석굴암 내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석굴암에서 뒤돌아본  보월당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구 선생의 글씨


사패산 방향을 바라보면 극락전이 있다. 문이 닫혀 있어 내부는 볼 수 없지만 극락전 창호의 전통무늬가 매우 아름답다. 특히 극락전에서 뒤돌아보는 풍광에 사슴이 확 트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극락전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극락전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극락전의 창호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극락전에서 뒤돌아 본 산신각(좌)과 보월당(우)

 
좌측 산기슭에는 산신각이 서 있다. 이 사찰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곳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니 신선이 따로 없다. 주변엔 샛노란 루드베키아가 지천으로 피어 있어 분위기가 화사하다. 인기척을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니 산신각을 내려오자 키가 작은 할머니 한 분이 전각에서 나와 산신각으로 들어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산신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산신각에서 내려다본 보월당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월당


회룡골의 회룡사 바로 뒤쪽에 김구선생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절 집이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다. 절 집을 나서며 몇 차례나 뒤돌아본다. 두루마기를 입은 백범이 길손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드는 듯하다. 끝.

         ☞ 스크랩 안내 : 다음 블로그(http://blog.daum.net/penn1570)  


728x90
반응형
Posted by pennpen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