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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민 중에서 독립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재임시절인 제1공화국 당시 100환(지금의 10원)권 지폐의 뒷면은 독립문이 차지할 정도였으니까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소재 서대문 독립공원 내의 독립문(사적 제32호)은 구한말인 1897년 서재필(徐載弼) 중심의 독립협회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국민의 헌금으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석문입니다.

 

 

                                                         제1공화국 100환 지폐의 독립문 도안 (1955년 발행)

 

 

 

 

 


신라시대에 당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받들고 조공을 바친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들며 조공을 바친 사대정책을 계속해 왔습니다. 조선 태종 7년(1407년) 명(明)의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을 건립하고, 근처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을 건립했습니다. "영은(迎恩)"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며, "모화(慕華)"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의미입니다. 명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중화사상으로 이어져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교체된 뒤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영은문

                                                                               1902년의 독립문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나중에는 북벌론까지 등장했는데 구한말 청나라가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 된다는 여론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때 서재필 선생이 주도한 독립협회는 고종의 재가를 받아 치욕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했습니다. 또 모화관을 수리해 독립관으로 용도를 변경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은 독립문의 높이는 14.28m, 너비는 11.48m입니다. 45×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습니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습니다.(☞ 독립문 현판글씨와 관련 민족 반역자 이완용의 글씨라는 주장이 있어 아무리 이완용이 독립협회 회원이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황당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김자동 옹은 2014년 자신의 조부인 김가진이 썼다고 주장한 책을 출판했다고 합니다. 권위 있는 기관에서 이를 명백히 밝혀 더 이상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욕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독립문 글씨(한글)

 

                                                                             獨立門 글씨(한자)    

 

 

    

원래의 독립문은 현재의 금화터널로 이어지는 고가다리 밑 사거리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1979년 금화터널공사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7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1968년 상경한 이후 서대문 네거리 쪽으로 자주 지나다녔던 필자는 이 독립문의 이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독립문 바로 앞에 나란히 세워진 두 개의 석주(石柱)는 바로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의 기둥을 바쳤던 초석입니다. 헐리기 전 영은문은 이 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덮은 모습이었습니다. 영은문 주초(柱礎)는 사적 제33호로 지적되어 있습니다.

 독립문 앞 영은문 주초(석주)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사적 제33호를 알리는 영은문 주초

 
 


사실 정면에서 독립문사진을 찍을 때 영은문 석주 때문에 방해를 받아 사진이 깔끔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영은문 같은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므로 그 석주를 보존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렇게 독립문을 이전하면서 독립문 바로 앞에 세워야 하는 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원래 독립문과 석주를 나란히 배치한 것을 살린 때문이겠지요. 또한 독립문 정도면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될 만한데 사적(史蹟)으로만 지정된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역사가 일천(약 118년경과)하고 또 36년 전 이전한 게 그 이유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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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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