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은 어디일까요? 펜화가 김영택에 의하면 불보사찰인 양산 통도사도, 법보사찰인 합천 해인사도, 승보사찰인 순천 송광사 등 이른바 삼보사찰은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정답은 어디일까요? 바로 지금 답사하려는 양주 회암사입니다. 그런데 이 회암사는 유감스럽게도 전부 폐사되어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먼저 다음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회암사(檜巖寺) 관련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회암사의 창건 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후기 지공, 나옹 등의 고승들이 배출되면서 유명해졌고, 사찰의 규모도 더욱 확대되었다. 조선 중기에 문정왕후의 관심으로 영화를 누렸으나, 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원인 모를 화재로 폐사되었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회암사의 절터인 회암사지(국가사적 128호) 전망대에 비치되어 있는 설명서에는 비교적 쉽고 상세하게 회암사의 흥망성쇠를 설명하고 있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아래 두 장의 사진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다만 한 때 3,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 정도의 대사찰이 이토록 철저하게 폐사(廢寺)되었는지는 정말 불가사의합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회암사지는 한 마디로 드넓은 평원 같습니다. 회암사지 전각 추정도를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할 것입니다. 기단과 맷돌 등을 보면 꼭 고대의 왕궁터를 보는 듯 합니다. 1997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사업도 완료된 듯 현재는 발굴모습을 볼 수 없네요. 그리고 문화재보호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막은 것은 잘 한 조치입니다.
전망대에는 회암사가 배출한 고승 3인의 인물상이 있는데, 회암사 홈페이지에서 이들의 약력과 업적을 발췌해 가져 왔습니다.
▲ 지공선사
인도의 승려로 인도의 동북지방 갠지즈강 유역에 위치했던 마가다국 만왕(滿王)의 왕자로 태어나 8세 때 출가하였다. 19세때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왔다.
고려에서는 1326년 3월부터 1328년 9월까지 머물렀으며 이때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기록이나 조선전기의 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오랜 기간이 아니지만 고려 불교계에서의 그의 족적은 상당하다. 회암사는 그가 고려에서 가장 중요시하였던 사원이었고, 대표적 계승자인 나옹이 중창하고 그의 석비와 부도를 세웠다. 이곳은 조선전기에 가장 큰 사원으로 그의 법통을 이은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회암사에 남북으로 반대방향으로 임진강과 한강의 중부지역에 각각 자리잡은 화장사와 신륵사는 그의 기념사원이거나 문도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 나옹선사 (1320-1376)
영해 출신으로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1340년(충혜왕 1) 친구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껴 공덕산 묘적암에서 출가하였다. 또 1344년에는 수도하며 회암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이곳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승려 석옹(石翁)에게 이를 인가 받았다.1347년(충목왕 3)에는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 머물며, 4년여를 지공에게 수학하였다.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했다가 공민왕의 청으로 잠시 신광사에 머물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구월산ㆍ용문산ㆍ원적산ㆍ금강산 등을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1371년에는 왕에게 금란가사ㆍ내외법복ㆍ바리 등을 하사받았다. 이후 잠시 송광사에 머물다가 다시 회암사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하고 1376년(우왕 2)에는 문수회(文殊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왕명에 따라 밀양의 영원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철저한 불이(不二)사상의 토대에서 선(禪)을 이해했고, 고려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 무학대사 (1327-1405)
경남 합천출신으로 속성은 박씨이고, 휘는 자초(自初),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년(충혜왕 5) 소지(小止)에게 출가하였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우며 부도암에 머물다가 1346년(충목왕 2)『능엄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진주 길상사ㆍ묘향산 금강굴 등을 유력하고, 1353년(공민왕 2) 연경으로 가서 지공에게 배웠으며, 이듬해 법천사에서 나옹을 처음 만난 후 무령 오대산ㆍ서산 영암사 등으로 나옹을 찾아가 수도하였다. 1356년 귀국하였으나, 나옹 또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무르자 1359년(공민왕 8) 다시 찾아가 나옹이 전하는 불자(佛子)를 받았고, 1371년(공민왕 20)에는 송광사에서 나옹에게 의발(衣鉢)을 받기도 하였다. 1376년(우왕 2) 회암사의 중창이 끝난 후 나옹이 그를 수좌로 삼으려고 하자 사양하였고, 나옹이 입적하자 명산을 유력하며 자취를 감추고 왕사로 삼고자 하는 공양왕의 뜻을 사양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왕사에 책봉되었고, 태조의 명에 따라 회암사에 머물렀다. 1393년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는 수탑(壽塔)을 세우고, 이듬해 용문사로 들어갔다가 1402년(태종 2) 다시 회암사에 잠시 머물다가 금강산 진불암을 거쳐 1405년 금강암에 거처하다가 입적하였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거나, 한양 천도와 관련한 풍수설화 등에서 조선 태조와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조선 건국 직후에는 태조에게 유교와 불교의 작용이 다르지 않음과 백성의 어버이로서의 태도를 설법하기도 하였다.
☞ 가는 길 : 전철 1호선 양주 역(건너편 버스정류소)에서 30번 버스를 타고 "김삿갓교"내려 걸어가거나,
덕정역에서 78번 마을버스를 타고 회암사 입구에서 내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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