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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위치한 건축물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이 안정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불편한 생활을 하는 것을 알게 된 권영일 등 33명이 돈을 모아 1947년 이 집을 사서 기증했는데 이때부터 이화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집의 구조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살던 본관, 내각을 구상하고 조각(組閣)을 발표했다는 조각당, 1985년 이화장의 효과적인 보존관리와 유족들의 생활을 위해 지은 생활관이 있다. 본관은 1988년부터 역사자료 및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평소 사용하던 가구 및 유품을 전시해 개방하고 있다.


이화장은 우리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내외가 1947년부터 경무대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던 가옥이다. 낙산공원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평소 육중한 철제대문이 닫혀 있지만 관람을 예약한 사람이 전화(02-762-3171)를 하면 문을 열어 준다. (☞ 인기 칼럼니스트인 조용헌은 이화장의 철제대문을 전통한옥의 솟을대문으로 바꿀 것을 제의했는데 전적으로 동감이다. 우중충한 철제대문과 한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아니한다.)

이화장 철문

 
 
뜰에는 이 대통령의 동상이 서 있다. 좌측의 본관(전시관)으로 들어선다. 건물에는 남북통일(南北統一), 경천애인(敬天愛人), 민족정기(民族精氣), 안빈낙업(安貧樂業) 등의 친필휘호가 부착되어 있다.

정원의 동상

이승만 대총령의 휘호(남북통일, 경천애인)


본관건물 외벽에는 지금까지 신문과 서적에서 보았던 귀중한 역사적인 사진이 액자에 넣어진 채 걸려 있다.
 

기념관 외벽의 사진전시모습

문화재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방문객들






오스트리아 출신인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체구는 작지만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녀의 소지품 중 핸드백은 모서리가 닳도록 사용했고, 몽당연필은 붓대를 끼워 썼다. 특히 양산을 30년 동안 사용할 정도로 늘 검소해 일반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나라가 어려울 때였지만 국모로서 참으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하와이교민들은 1934년 결혼 당시 이승만이 외국인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영부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고 한다.

                                소녀시절의 프란체스카(1916년의 모습)


프란체스카 비망록

헤진 핸드백

장신구 및 악세사리
 


서재의 책상에는 골동품 같은 타자기가 한 대 놓여져 있다. 이승만이 직접 타자를 치는 모습의 사진도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 서재


이 대통령의 비망록

침 실



동상이 있는 곳의 언덕에는 조각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조그만 한옥이 있다. 정부수립 후 첫 내각을 구성하여 발표한 장소라고 한다.

조각당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미군정 종료후 대통령이 되었으며 6.25전쟁을 치르며 잿더미로 변한 나라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제2차대전후 초강대국이 된 미국과의 우회협력관계를 돈독히 하고 한미방위를 튼튼히 하는 등 나라의 기초를 세웠다. 그러나 장기집권에 눈이 먼 이기붕 일파의 3.15부정선거와 이로 인한 4.19혁명으로 하와이로 망명해 쓸쓸히 여생을 보냈다. 

존경할 만한 국가의 지도자가 없는 현실에서 건국의 기초를 다진 이승만 대통령과 보리고개를 없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만 획책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까 하는 아쉬움이 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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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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