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청에서 바라본 천불동계곡과 울산바위
끝청에서 바라본 남설악 등선대
구곡담 계곡의 단풍
국립공원 지리산은 산세가 크고 두루뭉실한 육산이라 "어머니 산"이라고 부르는 반면, 설악산은 암릉과 폭포 및 계곡이 아름다워 "산중의 미인"이라고 부릅니다. 설악산의 가장 인기 있는 등산로는 천불동계곡, 공룡능선, 십이선녀탕계곡, 서북능선 등이지만 글쓴이는 아직까지 미답인 봉정암과 구곡담계곡을 답사할 계획입니다.
봉정암을 가려면 당일치기로는 불가능하여 무박산행에 참가합니다. 서울 사당역에서 밤11시에 떠난 등산버스는 최근 개통된 서울-춘천간 고속국도의 도움으로 새벽 2시 45분에 한계령에 도착합니다.
이른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한계령에는 벌써 여러 대의 대형버스가 도착하여 등산객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신속하게 등산로 입구로 들어섭니다. 처음부터 시작되는 가파른 계단 길에 숨차 오릅니다.
모두들 이마에는 광부처럼 헤드렌턴을 달고 어둠을 밝히며 걷습니다. 그런데 그만 등산로지체가 반복됩니다. 때로는 전혀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전국에서 설악산의 단풍을 보기 위해 밤을 밝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등산로를 가득 메운 때문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등산객들의 발자국 따라 유성처럼 움직이는 불빛입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이 총총합니다.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인기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구절을 생각합니다.
"북두의 일곱별이 여덟이 되는 날, 미실을 대적할 자가 나오리라!"
서북능선 삼거리에 도착하여 우측으로 들어섭니다. 잠시 정체가 풀리는 듯 하더니 다시 지체와 서행이 반복됩니다. 하도 오래 서서 기다리다 보니까 뒤쪽에 있는 사람이 고함을 칩니다.
"그 앞쪽에 있는 사람들보고 좀 빨리 가라고 전달하세요!"
이런 사람을 보고 산에 올 자격이 없는 고문관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일부러 등산로에 서 있는 것도 아닌데 뒤에서 소리친다고 앞으로 빨리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은 일종의 자기과시증후군 환자입니다.
몇 차례나 능선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먼동이 틀 때쯤 다소 부드러운 능선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등산로에는 넘어져 허리를 다친 등산객 한 명이 누워있습니다. 통증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합니다. 함께 온 일행들이 걱정스런 눈으로 환자 곁에 있습니다. 산에 올라 이런 안전사고를 당하면 본인의 고통은 물론 일행에게도 큰 피해와 부담을 줍니다. 따라서 산에서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안전산행 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그로부터 몇 시간 후 소방헬기가 환자를 후송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히말라야 고봉 14좌 완등을 앞둔 산악인 오은선 씨는 지난번 마지막 등정에서 정상을 400여 미터 앞두고 악천후로 인하여 중간캠프로 하산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프로답습니다.
"산은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안전하게 하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먼동이 훤히 튼 다음 뒤돌아보니 지나온 능선과 남설악 점봉산과 등선대, 가리봉과 주걱봉, 그리고 귀때기청봉의 서북능선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뒤돌아본 지나온 능선과 멀리 남설악 가리봉과 주걱봉
맑은 날씨에 동해의 일출이 불게 물들었지만 나무에 가려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합니다. 끝청으로 오르는 깔딱고개는 다리가 천근만근입니다. 중간에 지체로 인해 많이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녘의 산행에 많이 지쳤습니다.
일 출
지나온 능선과 서북능선상의 귀때기청봉
끝청의 등산객
끝청(1,604m)에서 조망을 감상하고는 중청(1,676m)으로 갑니다. 중청 대피소에서 대청봉(1,708m)은 오르지 아니하고 좌측으로 몸을 돌려 세워 소청봉으로 갑니다. 천불동계곡과 공룡능선, 용아장성릉과 울산바위 등의 장관을 보며 발걸음을 옮깁니다. 설악의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운해가 끼어 있어 오늘도 구름바다는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기가 맑아서 소청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설악산의 위용은 왜 바위산인 설악산을 산중미인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중청 대피소
범봉과 울산바위
조망대
소청가는 길에서 본 외설악
소청가는 길에서 본 내설악
설악산의 단풍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중청과 소청을 비롯한 해발 1천 미터 이상의 고지에는 이미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 있을 뿐 나뭇잎을 모두 땅위로 내려놓았습니다. 드디어 소청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공룡능선을 타려면 살짝 직진해서 가야하지만 글쓴이는 봉정암과 백담사 이정표를 보고 좌측으로 내려섭니다. 봉정암까지는 1.1km, 백담사까지는 12.0km입니다.
소청 이정표
내설악 뒤로 보이는 운해
잘 조성된 가파른 길을 내려섭니다. 중간에 소청산장(대피소) 있습니다. 그런데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이곳 산장이 무허가 건물임을 이유로 곧 철거한다고 해서 산장운영자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등산객들에게 호소하는 글을 붙여 놓았습니다.
소청산장
봉정암이 가까워 오자 용아장성릉의 암봉이 위압적으로 버티고 선 모습이 다가옵니다. 봉정암은 백담사의 부속암자로 신라 선덕여왕 13년(644)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려고 창건했으며, 5대 적멸보궁의 하나입니다.
봉정암의 기암
봉정암(1,244m)에 오면 반드시 사리탑으로 올라야 합니다. 불자일 경우 부처님의 사리가 보관된 5층석탑을 참배하는 목적도 있지만 일반인들도 이곳에 오르면 용아장성릉의 기암괴석과 공룡능선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봉정암 사리탑
용아장성릉이 시작되는 암릉
봉정암을 내려오면 사자바위(1,180m)라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잠깐 오르면 사자바위가 반겨줍니다. 또한 용아장성릉과 구곡담계곡의 풍경이 그림 같습니다.
사자바위
이제부터 깔딱고개를 내려서야 합니다. 지금은 등산로가 잘 조성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두 팔과 두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구곡담계곡에는 이름 그대로 폭포와 소가 많습니다. 설악산 지도를 보면 쌍용폭포, 용아폭포, 용손폭포, 만수폭포 등이 있지만 현지에 폭포의 이름이 적힌 안내문이 없어 쌍용폭포를 제외하고는 구별할 수 없습니다.
쌍용폭포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 영시암에 이르기까지 등사로 옆에는 화사한 단풍이 아름답게 피어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줍니다.
영시암은 조선조 삼연 김창흡이 숙종15년(1689년)에 일어난 장희빈 사건으로 그의 아버지 김수항이 죽음을 당하자 세상을 끊고 전국 산수를 즐기다 이곳에 암자를 짓고 은둔 생활을 하였던 곳으로 "세상과 완전히 인연을 끊겠다고 맹세하여 영시암"으로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그 후 6.25 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어 터만 남은 것을 도윤스님이 중창하였습니다.
백담사에서 약 3.5km거리에 위치한 영시암은 바로 등산로 곁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손에게 공양(국수)를 제공하는 매우 고마운 사찰입니다. 글쓴이도 국수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하고는 길을 재촉합니다.
영시암
이제부터는 수렴동 계곡입니다. 영시암에서 백담사까지는 3.5km거리이며 길도 매우 평탄하지만 무박산행으로 이미 10시간을 이상을 걸어온 상태라 체력이 거의 바닥났습니다. 주변의 화려한 단풍을 카메라에 담으며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깁니다.
드디어 산행의 종점인 백담사입니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이 기거하며 <님의 침묵>을 저술한 곳으로 유명하지만, 근래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은둔생활을 한 곳으로 잘 알려진 내설악의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백담사
오늘 산행에 거의 12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한계령에서 끝청까지 가는 길에 지체로 인하여 시간이 다소 많이 걸렸습니다. 무박산행은 버스를 타고 오면서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고, 또 적어도 10시간 이상 산행을 해야 하므로 글쓴이는 가급적 이에 참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악산 봉정암이나 공룡능선을 타려면 서울에서 당일산행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입니다. 다만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체력의 한계를 느낍니다. 인간은 세상의 모든 산해진미를 다 먹을 수 있지만 나이를 먹고는 오래 살 수 없음을 실감합니다.
《등산 개요》
△ 등산 일자 : 2009년 10월 10일(금요무박, 토요일)
△ 등산 코스 : 한계령-서북능선 삼거리-끝청-중청대피소-소청-소청산장-봉정암-사자바위-쌍용폭포-구곡담계곡
-구곡담대피소-영시암-수렴동계곡-백담사
△ 소요 시간 : 11시간 50분
△ 산행 거리 : 20.7km
△ 등산 안내 : 안전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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