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응산 청하루에서 바라본 예천읍 전경
경북 예천군 예천읍·유천면·용문면에는 흑응산(217m)∼봉덕산(373m)∼봉화산(340m)∼백마산(383m)의 능선이 이어져 있는데 이들은 예천읍을 북쪽에서 감싸고 있는 형국입니다. 어떤 이는 이 길을 예천 둘레길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 현장에서 이런 안내문을 단 하나도 목격하지 못해 자신 있게 말 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그런데 흑응산과 봉덕산 등산로에서는 현지 주민인 듯한 사람들을 자주 만났지만 봉화산과 백마산 능선에서는 함께 한 산악회 회원 이외 다른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으며 특히 백마산 오름 길은 급경사에 등산로가 분명치 않아 오르는 데 가장 힘들었습니다.
흑응산 산행들머리는 예천읍 사무소 오른쪽 대창중고 입구입니다. 등산버스가 정차한 곳은 세중 수퍼 앞인데 좌측으로 들어서니 학교건물이 보입니다. 벽화를 지나 학교로 진입해 바로 빠져나갑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괜찮지만 개학 중에는 이 길을 이용해서는 곤란할 듯 합니다. 길목에 있는 예천향교는 규모가 상당히 커 보입니다. 오른쪽으로 내려서니 봉덕산 생태문화탐방 종합안내도가 이방인을 반겨줍니다. 또 흥응산 정상의 정자 청하루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길을 제대로 찾았음에 안도합니다.
대창중고 담장
예천향교
여기서부터 계단을 올라 잘 조성된 길과 이정표를 보고 청하루까지 가는 길은 매우 쉽습니다. 길목에는 시인 안도현이 지은 "醴泉(예천)"이라는 시가 표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안도현은 안동과 예천지방에서 사용되는 특유의 방언으로 시를 지었군요. 지나가면서 급하게 사진 한 장을 찍었는데 사진의 상태가 선명하지 못해 가독성(可讀性)이 어려워 전문을 옮겨 적습니다.
안도현의 예천
<예천(醴泉)> 안도현
있잖니껴, 우리나라에서 제일 물이 맑은 곳이
어덴지 아니껴? 바로 여기 예천 잇시더
물이 글쿠로 맑다는 거를 어예 아는지 아니껴?
저러쿠러 순한 예천사람들 눈 좀 들이다 보소
사람도 짐승도 벌개이도 땅도 나무도 풀도 허공도
마카 맑은 까닭이 다 물이 맑아서 그렇니더
어매가 나물씻고 아부지가 삽을 씻는 저녁이면
별들이 예천의 우물속에서 헤엄을 친다 카대요
우물이 뭐이껴? 대지의 눈동자 아이껴?
예천이 이 나라의 땅의 눈동자 같은 우물 아이껴?
이 시를 읽다보니 오래 전 글쓴이가 안동 36사단에서 군복무를 할 당시 경험한 일이 떠오릅니다. 사단 우체국에서 사병이 "통신대 우편물 온 거 있니껴?"라고 물으면 상대방은 "있니더, 없니더"라고 대답하는 말을 들었거든요. 안동과 예천지방의 방언은 묻는 말은 "니껴?"로 대답하는 말은 "니더"로 처리하는 것을 보고는 같은 경상도 지역이지만 경남출신인 필자와는 방언이 상당히 다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곧 이어 위풍당당한 정자가 보이는 데 바로 이정표에 적혀 있던 청하루(淸河樓)입니다. 누각의 천장도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네요. 청하루에 오르면 예천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대입니다. 정자아래 흥응산(217m)이라는 표석이 다소 초라하게 보입니다. 당초 일기예보에는 이곳 예천읍 지역은 1∼5mm의 눈 또는 비가 내린다고 했지만 사진에서 보듯 약간의 구름과 안개만 끼어 있을 뿐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일 정도로 날씨가 좋아졌습니다.
청하루
청하루 내부
청하루에서 본 예천읍
가야할 봉덕산 조망
흑응산 정상표석
이제 청하루를 뒤로하고 봉덕산 이정표를 따라 갑니다. 길목에 흑응산성 유아숲 체험원이 있는데 통상 "유아(幼兒)"는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초등하교 입학 전까지의 어린이"를 말하므로 "어린이 숲 체험원"으로 이름을 지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 어린이는 보통 만 6세 이상 13세 미만의 연령대에 속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유아(만 1~5세)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가니 흑응산성 안내문이 나옵니다. 이 산성은 덕봉산성 또는 봉덕산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산성은 흑응산 정상에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것으로 내성과 외성 이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성벽의 둘레는 1,900m, 높이 3∼4m로, 내성 안에는 우물 2개와 연못 1개가 있다고 합니다. 신라토기 조각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초기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산신당을 지나니 내리막 등산로에 태국기가 꽂혀 있는데 그 전에는 길을 가다가 태극기를 만나면 무척 반가웠지만 지금은 특정 단체가 이 태극기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바람에 태극기에 대한 국민들의 순수한 애국심에 흠집을 낸 것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중간 중간의 이정표는 정말 잘 되어 있군요. 길목에 봉덕산 안내문이 있는데, 사벌국 사람들이 왕후의 능에 와서 제사를 지낼 때 이 산을 보고 능의 뒤에 있는 산이라고 하여 <봉덕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맞은 편에서 현지인 같은 몇 명의 남자가 지나갑니다. 그중 한 명이 필자에게 묻습니다.
"멀리서 오신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서울서 왔습니다."
깜짝 놀란 그가 되묻습니다.
"아니 유명하지도 않은 산인데, 여기 뭐 보러 오셨어요?"
"유명하지는 않지만 산은 산이니까요!"
필자는 대답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조금 더 가노라니 맞은 편에서 한 남자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갑니다. 사실 과거에는 산에 가면 야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더러 목격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는데 이 남성은 예외입니다. 그도 지나가면서 필자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고 서울서 왔다고 했더니 그의 대답은 예상을 빗나가게 만듭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 남자의 말을 듣고 보니 기분이 좋아졌고, 조금 전 남자의 말과 대비가 됩니다. 볼 것도 없는데 뭐 하러 왔느냐고 하는 말과 잘 왔다고 하는 말은 뉘앙스에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 등뒤에서 또 크게 노래를 부르며 멀어져 갔는데 매우 기분 좋은 사연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산에서 고성방가 하는 버릇은 좀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길을 지나 송전철탑을 뒤로하니 멧돼지가 출몰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사실 지금 전국적으로 천적이 없는 멧돼지 개체수가 늘어나 주민생활에 불편을 주고 있는데 근본적인 대책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악사 갈림길을 지나니 봉덕산∼백마산 전투 안내문이 서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과 경찰의 혼성부대(8사단 21연대)와 북한 군이 대치한 싸움 끝이 우리측이 승리했다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조금 더 가니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덕산(373m) 정상입니다. 아담한 정상표석과 돌탑이 반겨주네요.
백마산 방면의 조망
이제부터는 백마산 방면으로 갑니다. 지금까지의 등산로가 신작로 같았다면 앞으로의 길은 오솔길입니다. 고도를 낮추었다가 가는 길목에 서암산 봉수대가 있는데 이런 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게 뜬금 없고 또 서암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리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백마산 이정표를 따라 길을 가는데 우측은 출입을 금하는 철조망이 쳐져 있군요. 아마도 산에서 나는 작물의 채취를 방지하려는 듯 합니다. 소나무 숲을 지나 오른 봉우리는 봉화산(340m)입니다.
서암산 봉수대
봉화산을 뒤로하고 백마산으로 갑니다. 백마산을 300m 앞둔 안부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은 등산로도 불분명하고 경사도 워낙 가팔라 사람들 모두 혀를 내두릅니다. 낙엽이 깔려 미끄러운 길을 겨우 올라서니 백마산(386m)을 알리는 안내문이 고생한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백마산이라는 산 이름은 매우 거창하지만 조망도 전혀 할 수 없는 평범한 산입니다.
백마산 가는 급경사길
백마산 안내문
백마산을 지나 용문면의 산불감시초소에 서면 서쪽으로 허연 바위를 머리에 인 희양산(999m)의 모습이 유난히 빛납니다. 그러나 사진 상으로는 그냥 하나의 점처럼 보이네요. 한참 길을 가다가 다시 올라선 봉우리에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또 백마산(388m)이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럼 아까 만났던 백마산은 무엇인가요? 그래서 어느 산꾼은 이곳에 백마산 서봉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사실 남덕유산 서쪽의 서봉은 깊은 골짜기로 빠졌다가 다시 올라야 하기에 서봉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 하지만 이곳은 전혀 상황이 다릅니다.
산불감시초소
서쪽으로 보이는 희양산(동그라미 내)
제2의 백마산 안내문
백마산 봉우리를 내려와 점점 고도를 낮추니 도로인데 좌측으로 가면 백룡사이지만 우리는 우측으로 내려섭니다. 한적한 건축물에는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군요. 이제부터는 지루한 시멘트길이 이어집니다. 양봉장을 지나 한참 걸어가면 용산2리 노인회관입니다. 몇 가구가 되지 않은 전형적인 산촌마을에는 마굿간의 소들이 평화롭게 쉬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측으로 몸을 돌려세워 작은 고개를 넘어 논밭사이로 난 도로를 걷다가 산밑에서 숲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딱딱한 시멘트길을 한참동안 걸어와서 그런지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양봉장
봉덕산 자락으로 들어와 다시 고도를 높이는 일은 참으로 지루하고 피로한 작업입니다. 드디어 희미한 길이 끝나고 분명한 주능선 길을 만납니다. 이 길은 아까 봉덕산 정상을 가면서 이미 지나갔던 길입니다. 아는 길을 만나니 피로가 좀 풀리는 듯 한데 잠시 후 서악사로 내려가는 삼거리 갈림길에 다다랐을 때는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서악사 가는 길
이제부터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잘 조성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봉덕산 서악사에 도착합니다.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자료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사찰의 규모는 매우 큰 듯 합니다. 특이하게도 일주문 앞 건축물 옆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있어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작성하면서 확인해 보니 유치원을 운영한다고 합니다.
서악사
어린이 놀이터
이제 도로를 따라 예천역까지 가서 좌측으로 돌아 한천을 가로지르는 신예천교를 건넙니다. 다솜길을 알리는 하트형 시설물 옆 주차장에 등산버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12km 산행에 약 4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단축된 것은 도로를 많이 걸었기 때문입니다. 흑응산과 봉덕산 능선은 예천군민들이 사랑하는 산이라 등산로가 잘 정비된 반면, 봉화산과 백마산 길은 다소 거칠었습니다. 아무튼 이번 예천 산행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을 듯 합니다.
한천
다솜길
《등산 개요》
▲ 등산 일자 : 2017년 2월 5일 (일)
▲ 등산 코스 : 세중 수퍼-대창중고-흑응산(청하루)-산신당-서악사 갈림길-봉덕산-서암산 봉수대-봉화산-백마산
-제2백마산-백룡사 갈림길-도로-봉덕산 능선-서암사 갈림길-서악사-예천역-신예천교-주차장
▲ 등산 거리 : 12.1km
▲ 산행 시간 : 3시간 50분
▲ 산행 안내 : 서울 청마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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