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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 이전에는 도민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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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념이나 추억이 될만한 자료를 소중히 보관하는 편입니다. 따라서 학창시절의 학생증도 중학교 때부터 모아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소지하고 있는 각종 증명서 중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것은 40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도민증(道民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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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인 형님이 일찍부터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는 바람에 내가 집안의 모든 서류를 챙기다보니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도민증도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잘 간수해 오던 도민증을 약 2년 6개월 전 이사를 한 후부터 찾을 수 없어 분실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최근 책장을 정리하며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럼 먼저 도민증의 기재사항을 살펴보겠습니다.  

     ▲ 아버님의 도민증

       본    적 함안군 대산면 옥열리 597번지,
       현 주 소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575번지,
       소속국민반 중앙동 6반
       세 대 주 본인
       직    업 농업
       성    명 이원주(李元珠),
       연    령 단기 4240년 2월 18일(52세) (서기 1907년)
       우기(右記)와 여(如)히 증명함
       단기 4291년 8월 (서기 1958년)
       함안경찰서장


      <주의사항>
       1. 본증은 상시 휴대하여 신분증으로 할 것이며 타인에게
          대여함을 불허함.
       1. 군경이 제시를 요구할 시는 차(此)에 응할 것.
       1. 본증 기재사항 중 변경이동이 유(有)할 시 또는 분실시는
          즉시 계출 정정 또는 재교부 신청할 것.
       1. 본도로부터 퇴거 또는 사망시는 발행관청에 반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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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도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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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도민증

 
위 도민증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50년 전 이를 발행할 당시는 현재의 주민등록증 대신에 도민증이 있었으며, 서기(1958년) 대신에 단기(4291년)를 사용하였고, 발행기관도 현재와 같은 특별·광역시장 또는 도지사가 아니라 일선행정단위의 경찰서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한글 대신에 한자를 사용하고, 주의사항의 내용도 매우 딱딱한 지시명령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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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도민증에 사진이 없는 것은 명함판 사진 한 장 남겨 두지 않고 별세하였기에 도민증사진을 확대하려고 떼어 사진관에 맡기는 과정에서 분실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나란히 계시는 사진은 어머님의 명함판사진과 누나의 결혼식 때 찍은 가족사진중 아버님의 사진을 합성하여 겨우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도민증을 꺼내보니 글쓴이가 어렸을 때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아버님은 가문의 4대 종손으로서 3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을 부양해야 했으며, 위로 오빠 한 분을 둔 어머님은 우리 가문으로 시집오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시동생과 시누이 등쌀에 시달리며 죽을 고생만 했습니다. 특히 막내 삼촌은 얼마나 개구쟁이 인지 그야말로 놀부처럼 남의 집 호박에 말뚝을 박아 어머님께서 그 호박의 주인으로부터 시동생하나 제대로 타이르지 못한다고 바가지로 욕을 먹기도 하였답니다.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김해지방으로 피난을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식구들은 아버님께서 품을 팔아 그럭저럭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어서 점심은 거의 먹어 본 적이 없었고, 아침저녁도 시래기죽이나 수제비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6.25동란이 휩쓸고 지나간 상처를 안고 모두가 살기 힘든 처지에 일감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이 없을 때는 그야 말로 한숨만 쉬는 날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집안이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 속에 허덕이게 되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가난에 대해 불평을 할 형편이 아니었고, 또 내가 어느 정도 사리 분별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부모님은 이미 이 세상 분들이 아니어서 그 이유를 물어 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가정형편이 이러하였으니 나는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중학교진학도 포기한 채 나무하고 풀 베는 일을 1년 동안 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장학생으로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7년 여름 별세하셨습니다. 큰 병원으로 가서 제대로 된 진단도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동네의원으로부터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나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크게 세 번 울었습니다. 첫 번째는 맨 처음 운명하셨다는 것을 알고 이제부터 아버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묘지에서 하관하고 상주로서 삽에 흙을 담아 관 위에 뿌릴 때였으며, 세 번째는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빈소에 아버님은 보이지 않고 생전에 쓰시던 중절모와 신던 고무신 및 지팡이 그리고 담뱃대만 쓸쓸하게 놓여 있을 때였습니다.

어머님은 내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은행에 근무할 당시인 1969년 돌아가셨습니다. 평소 생활하시는데 불편은 없었지만 고향집 마당에서 돌에 걸려 넘어져 의식을 잃은 후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고 허무하게 이승을 하직했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한번 할 기회도 없이 두 분을 떠나보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자식으로서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독자여러분도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 자주 찾아뵙고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 바랍니다. 돌아가신 후 제사를 모시고 또 추모하는 것도 물론 우리의 좋은 미풍양속이지만, 저 세상에 계신 분이 이를 어찌 알겠습니까?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암흑기와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25동란을 겪으면서 고생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 부모님을 비롯한 우리의 선조 들에게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내가 죽고 나면 내 자식들은 이 빛 바랜 도민증에 얽힌 사연을 전혀 모르겠지요. 지금의 아이들은 대부분 배고픔보다는 너무 잘먹고 많이 먹어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1950∼70년대 세계의 최빈국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세대들을 절대로 폄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의 국력이 이처럼 성장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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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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