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가 빛나는 청계산∼강씨봉 능선
청계산하면 바로 관악산과 나란히 있는 과천의 청계산(618m)을 떠올리지만 포천과 가평에도 청계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있습니다. 포천시 일동면과 가평군 하면에 위치한 청계산(849m)은 산세가 우람하고 주위에 강씨봉, 귀목봉, 길마봉이 있어 제법 다양한 산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청계산은 때묻지 않은 계곡과 울창한 수림을 자랑하며, 가을이면 낙엽이 운치를 더 합니다.
의정부 역에서 138-5번 포천행버스를 타고 일동터미널에 하차합니다. 여기서 택시로 필로스 골프장 방향으로 들어가 노채고개에서 내립니다. 고갯마루에는 아무런 이정표가 없어 이방인은 현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좌측의 희미한 등산로로 약 100미터 정도 들어서자 경기도소방본부에서 세운 긴급연락안내판이 있는데, 그기에 "노채고개입구"라는 이정표가 적혀 있어 쓴웃음을 짓습니다. 이 이정표는 오히려 고갯마루에 세우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길마재로 오르면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필로스 골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지인이 회원권을 가지고 있어 수 차례 들렸지만 이제 천하의 백수신세라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습니다. 길마봉 능선에 오니 비로소 남쪽으로 조망이 터집니다. 무엇보다도 현등사를 품고 있는 억센 운악산이 매우 기품이 있어 보입니다.
릴로스골프장
전망바위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운악산
헬기장을 지나 조금 더 가니 길마봉(길매봉, 735m)입니다. 여기서 북쪽의 청계산으로 내려서는 능선은 암릉길로서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능선상의 암봉에 올랐다가 내려서는 길은 매우 가파르지만 아무런 보조장치가 없어 순전히 팔과 다리의 힘을 이용해야 합니다.
길마봉(길매봉)
길마봉 암릉
길마봉 암릉 뒤로 보이는 청계산
힘들여 안부인 길마재로 내려서니 이곳은 군부대의 포사격훈련장이므로 등산로를 벗어나지 말라는 현지 군부대장의 경고문과 사고다발지역임을 알리는 경기도소방본부의 안내문이 서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산행 중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박격포 소리에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지축을 흔드는 듯한 굉음이 소리를 낼 때 실제로 전쟁이 발발해 포 사격이 시작되면 사람의 생명이란 오르지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불현듯 6.25전쟁당시 우리의 선조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당시 글쓴이는 매우 어렸고 우리가족도 피난을 갔다는 말 밖에는 듣지 못했지만 전쟁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훈련용 사격에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니 실제상황이라면 어찌 행동할는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다시 산길을 오릅니다. 가파르기는 하지만 조금 전 길마봉을 내려올 때와 비교할 때 어려운 구간은 없습니다. 고사목이 있는 능선에 올라 뒤돌아보니 아까 통과한 암릉길이 보입니다. 저토록 가파른 길을 어찌 내려왔는지 보기만 해도 아찔합니다.
청게산을 오르며 뒤돌아 본 길마봉 암릉
발목이 빠질 것 같은 낙엽 길을 걸어가며 모처럼 단풍나무를 목격합니다. 청계저수지 갈림길을 지나 조금 더 가니 드디어 청계산(849m)입니다. 네모난 화강암 표석이 볼품 없이 세워져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연인산이, 북동쪽으로는 명지산이 잘 조망됩니다.
귀목봉(좌)과 명지산(중앙)
이제부터 등산로는 매우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귀목봉 갈림길에서부터는 억새가 간간이 보입니다. 맑고 파란 하늘아래 국망봉과 강씨봉 능선이 바라보입니다.
가야할 강씨봉 능선(좌)
오뚜기고개에 도착합니다. 여기서부터 강씨봉까지는 2.5km입니다. 완만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뒤돌아보면 역광을 받은 억새가 흡사 노인의 눈썹처럼 하얗게 빛납니다.
우뚜기고개
헬기장에 올라서니 명지산과 지나온 청계산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한 걸음을 더 내디디니 드디어 강씨봉(830m)입니다. 우측으로는 경기도의 최고봉인 화악산(1,468m)이 군사시설물을 머리에 이고 있고, 북쪽으로는 국망봉과 그 좌측으로 가리산, 산정호수의 명성산이 선명합니다. 북서쪽으로는 관음산과 사행산이 보입니다.
명지산(좌측 뒤)
지나온 능선 뒤로 보이는 청계산(중앙뒤뾰족한 봉우리)
강씨봉
국망봉(우측)
화악산
강씨봉에는 "강씨"에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태봉국왕 궁예와 부하장수이던 왕건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을 당시 궁예의 부인 강씨가 현재의 강씨봉 아래 마을로 피난을 와서 봉우리 이름이 그와 같이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피난 온 강씨는 내내 철원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 방향에 있는 산은 국망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또 하나의 전설은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고 철원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의 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날로 폭정이 심해졌습니다. 그러자 강씨는 한사코 궁예에게 간언했으나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부인 강씨를 강씨봉 아래 마을로 귀양 보냈답니다. 그 후 왕건에 패한 궁예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강씨를 찾았지만 부인 강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여서 회한과 자책에 빠진 궁예는 국망봉에 올라 도성인 철원을 바라보았다고 하여 국망봉이란 산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도성고개까지 가는 길을 포기하고 다음 갈림길에서 좌측의 채석장 방향으로 내려섭니다. 낙엽이 수북히 쌓인 비탈길이 무척 미끄럽습니다. 거대한 채석장을 지나자 펜션 같은 멋진 건물이 나타났다가는 뒤로 사라집니다. 이런 오지에 외관이 멀쩡한 건물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채석장
펜션(?)
오후 6시가 가까워오니 사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서산에 해는 저물고 노을이 하늘을 발갛게 물들입니다. 새터마을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주중에 가볍게 시작한 산행인데 산악회 측에서 코스를 길게 잡아 무려 7시간 이상 걸었더니 다리가 뻐근합니다. 포천시내버스를 타고 일동으로 갑니다. 여기서 동서울까지 운행하는 시외버스(요금 5,700원)에 몸을 싣고는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청계산만 답사하려면 청계저수지를 산행기점으로 하면 별로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북정맥을 종주하려면 오늘 우리가 답사한 길마봉 능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등산 개요》
△ 산행 일자 : 2008년 10월 29일 (수)
△ 산행 코스 : 노채고개-길마재-길마봉-안부-청계산-귀목봉삼거리-오뚜기고개-강씨봉-
삼거리갈림길-채석장-새터마을
△ 산행 시간 : 7시간 15분
△ 산행 안내 : 백두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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