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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어느 금요일 저녁, 큰 아들녀석이 안방으로 오더니 다음날 뭐 하는지 나에게 묻는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 당연히 산에 가지!"
"그럼 몇 시에 오세요?"
"산에 가면 언제나 늦게 오잖아, 그걸 왜 물어?"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이 왜 이렇게 고치꼬치 캐묻나. 참 별일이 다 있군.
"내일이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라 일찍 오시면 저녁을 사 드리려고요!"

녀석의 대답에 나는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아니, 뭐라고?"

세상에! 다음 날이 결혼기념일인지도 모르고 산악회에 등산신청을 했으니 이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녀석에게 고맙다고 하고는 부엌의 아내에게 갔다.

"여보! 내일이 결혼기념일인데 내가 모르고 산에 간다고 신청했네. 미안해서 어쩌지!"
내 말을 들은 아내도 역시 결혼기념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고, 언제는 뭐 별도로 챙겼나요? 그냥 다녀오시오!"

금년이 어느 듯 결혼 27주년! 그렇지만 이번은 그동안 다니던 직장을 떠나 백수가 된 다음에 처음 맞이하는 기념일이다. 그래도 직장생활을 할 때는 수첩에 이날을 표시하였다가 꼭 하루 전에는 빈말이라도 함께 살아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는데, 금년은 기념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다음날 산에 갔다가 밤늦은 시각에 귀가하니 반쯤 먹다 남은 케이크만 식탁에 놓여 있었다. 큰 녀석이 케이크를 사서 아내와 함께 기념일 뒤풀이를 하였단다. 가슴이 짠해 온다. 예년 같으면 가족 외식이라도 할텐데 이제는 엄두를 낼 수가 없다.

그 다음날 시간이 있어 녀석에게 밥을 사 달라고 하였더니 녀석은 처음 제안했을 때 응하지 않아 이미 끝난 일이라고 한다. 이런, 야속한 녀석을 보았나. 그렇지만 부모의 결혼기념일을 챙겨주는 그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가상하다.

그 후로 결혼기념일 문제는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생일이 가까워 옴을 느꼈다. 달력을 찾아 음력을 확인하니 생일이 지난 지가 벌써 보름이 되었다. 이럴 수가! 내 수첩에는 산행계획만 빼곡이 적혀 있을 뿐 결혼기념일과 생일을 표시해 놓지 않은 것이 실수다.

글쓴이는 음력으로 생일을 따진다. 두 아이는 출생 때부터 시류에 맞추어 양력으로 생일을 치르지만 나와 아내는 음력으로 계산한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정해준 날짜이다. 고향에 어머님이 생존하였을 당시 어머님은 아무리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자식들의 생일만은 꼭 쌀밥을 가득 담아서 진수성찬을 준비하셨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가끔 생일을 그냥 넘긴 일이 있기는 하지만 약 1개월 간격으로 다가오는 결혼기념일과 생일을 동시에 잊어버리기는 처음이다. 지금까지 헛살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내도 이런 일에는 상당히 무관심하고, 평소 잘 챙겨주던 큰 녀석도 아무런 말이 없었으니 이상하다. 녀석도 군 복무 후 대학생활 하느라 많이 지친 표정이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남에게 피해를 준 일도 없고, 내 욕심만을 챙긴 적도 없는데, 직장을 물러나니 이토록 생활의 패턴이 달라지고 자꾸만 움츠려 드는지 모르겠다. 그 동안 인생의 쓴맛과 단맛 다 보았는데,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일자리가 없어 받는 서러운 맛은 정말 매운 맛이다. 

아내에게 어찌 남편 생일도 안 챙겨 주느냐고 한 마디 했더니 언제냐고 되묻는다. 그러면서 지난번 결혼기념일도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갈 뻔했다면서 염장을 지른다. 앞으로 돈을 벌어오면 잘 챙겨주겠단다. 아이고, 이 평생원수야!  

이명박 대통령은 11일 대한상공회의소 인천인력개발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나이가 들어도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평생일자리 개념으로 국가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나이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장서 은퇴한 사람을 시대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그 경륜을 인정하고 적재적소에 재배치하는 인식의 전환이 먼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것만이 청년백수뿐만 아니라 노인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 위 사진은 지난 여름 코엑스에서 개최된 빵페스티벌에서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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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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