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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삼천사 계곡에 위치한 삼천사는 통일신라시대(서기680년경)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그 규모가 대단히 커서 3,000여 대중이 모여 수도(修道) 정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서울지역 승병들의 운집처로 왜병들과 혈전을 벌였던 곳입니다.

그 후 삼천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으며, 경내에 있는 마애여래입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물 제657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삼천사계곡으로 들어가는 곳에는 "삼각산 적멸보궁 삼천사"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긴 장마가 그친 뒤라서 그런지 계곡에는 명경수(明鏡水)처럼 맑은 물이 철철 흐르고 있어 시원한 기운이 감돕니다. 사찰 앞마당의 5층 석탑과 삼각산삼천사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대웅보전 뒤로는 의상능선상의 용출봉(571m)이 삼각형의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일주문 앞의 손바닥만한 연못에는 수련 몇 송이가 곱게 꽃을  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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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산 적멸보궁 삼천사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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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 진입로의 시원한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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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층석탑과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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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련


일주문에 붙어있는 삼천사((三千寺)의 한자표기는 원래 삼천사(三川寺)였는데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기록하여 1745년 간행한 「북한지」를 따라 삼천사(三千寺)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당시 절에 머물렀던 승려가 3,000명 가량 되었다고 하여 삼천(三千)으로 절명을 삼았다는 설도 있지만 아마도 천불(千佛), 삼천불(三千佛)과 같은 신앙에 의해 절 이름을 바꾼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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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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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사 현판


일주문의 문짝에는 사천왕 대신에 이를 형상화한 인왕상을 그려 수문장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 다소 특이합니다. 돌계단을 오르니 대웅보전입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스님 두 분이 예불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웅전 안에는 금빛 찬란한 불상이 놓여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소개한 대로 사찰의 진입로에는 "삼각산 적멸보궁 삼천사"라는 표지석을 보았는데,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없어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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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 문짝의 인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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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 문짝의 인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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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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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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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불상앞에서 불공을 드리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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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의 화려한 문


그러면 여기서 적멸보궁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절 가운데는 불상(佛像)을 전혀 모셔놓지 않고 그 대신 법당 안에는 단(壇)만 있으며, 법당 밖 뒤편에는 사리탑을 봉안하여 놓은 곳이 있습니다. 이러한 곳을 적멸보궁, 또는 보궁이라 하는데 이는 사리탑에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를 모신 보배로운 곳이란 뜻입니다. 이는 신라 진덕왕 때 자장(慈藏)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받아와 우리나라에 모신 것이 그 기원입니다. 불상 대신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불전이 바로 적멸보궁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5개의 적멸보궁은 경상남도 양산군 영축산 통도사의 대웅전,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의 적멸보궁,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의 적멸보궁, 강원도 영월군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의 적멸보궁,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등입니다.

이와 같이 적멸보궁이라는 이름과 불상의 존재는 서로 상치되는 것인데 왜 삼천사에 적멸보궁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인터넷을 뒤져보아도 알 길이 없습니다. 처음 사찰을 창건할 때는 부처님 사리를 모셨다가 나중에 이전하여 중수하면서 부처님을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웅보전의 문은 정성을 들여 만든 문양으로 제작되어 있어 사찰의 정취를 느끼게 됩니다. 삼천사는 전형적인 산지형 사찰인지라 위로 조금씩 올라가면서 전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북한산의 줄기와 계곡의 물 흐름을 고려하여 대웅전을 서향으로 배치한 것도 보기 드문 현상입니다.

대웅전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갑니다. 축대 아래 계단에는 앙증맞은 두꺼비 조각상이 놓여 있습니다. 어미가 두 마리의 새끼를 등에 업고 있는 형상에 웃음이 나옵니다. 계단을 오르니 석종형세존사리탑이 있습니다. 등산로와 바로 연결되는 산문에는 "형통무량불전(亨通無量佛殿)"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정주상의 초서체 글씨로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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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꺼비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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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통무량불전 문과 석종


이제 보물인 마애여래입상을 감사할 차례입니다. 포개진 두 개의 큰 바위 중 아래의 암석에 돋을 새김으로 조각을 했습니다. 펜화가로 유명한 김영택 화백은 이 보물을 보고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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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애불과 산령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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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택화백의 펜화 (자료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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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애불


"삼천사 마애불의 얼굴은 바로 인심 좋은 시골 아저씨의 얼굴입니다. 복스런 코와 입술, 지그시 감은 눈에서 온화하면서도 엄숙한 표정을 볼 수 있습니다. 법복은 두 어깨를 가린 형식으로 통견(通肩)이라고 합니다. 칠을 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머리 위에 큰돌이 튀어나와 있어 모자 역할을 합니다. 그 밑으로‘ㅅ'자 모양의 홈을 낸 것은 지붕을 달아냈던 흔적으로 보여 집니다. 마애불 좌우로 깊게 뚫린 구멍도 지붕을 달아내기 위하여 나무를 박았던 자리입니다."


그러나 불상에 대한 안목이 전혀 없는 필자는 불상의 아름다움보다 불상 앞에 설치해둔 철골 막대기가 눈에 거슬려 얼굴을 찌푸립니다. 

마애불의 오른쪽에는 2층으로 된 산령각(山靈閣)입니다. 산령각 안에는 그동안 만화나 그림으로만 보던 산신령의 조각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허옇고 긴 수염을 가진 백발노인이 신통력을 부리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산신령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며, 배경도 색칠을 한 탱화가 아닌 입체조각임이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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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령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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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령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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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령각의 산신


이 산령각의 기도효과가 크다고 소문이 나서인지 몇몇 신도가 조용히 앉아서 책을 보거나 명상에 잠겨 있습니다. 본래의 삼천사 터는 마애불 앞에서 1km쯤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1978년 마애불 옆에 삼천사를 새로 세웠습니다. 공사를 시작할 때 대규모의 중장비를 동원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바위들이 꼼짝을 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답니다. 삼각산의 힘있는 산신들이 방해를 놓은 것이라고 하네요.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결국 산신제를 크게 지내고서야 공사 진행을 할 수 있었기에 산령각의 기도효과가 각별하다고 합니다.

산령각에서 바라보는 가람이 매우 오밀조밀합니다. 1층으로 내려오니 문 앞에 주인 없는 지팡이만 놓여 있습니다. 주인이 있으면 짚신이나 고무신이라도 있을 테지요. 이 지팡이의 주인은 어디로 갔을 까요. 산신령에게 드린 기도의 효험으로 지팡이 없이도 다닐 수 있게 되어 산문을 떠나 속세로 되돌아갔을 까요. 아니면 이 풍진 세상을 등지고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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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령각에서 내려다 본 삼천사(입구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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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 없는 지팡이


마애불상 앞에는 두 여성이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부디 저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바랍니다. 삼천사는 사회사업을 많이 하는 사찰로 알려져 있어 부처님도 중생들의 기도를 잘 들어주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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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를 드리는 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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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의 명경수



<삼천사 찾아가는 길>
서울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에서 시립 은평노인 종합복지관을 지나
기자촌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삼천사 안내 표지판이 나옵니다. 또는 구파발역에서 북한산성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삼천리골 삼거리에서 내려 개천을 따라 가면 이정표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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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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