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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려 장군 기마상

 



김취려(金就礪)(?∼1234)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서 대장군이 된 인물이다. 음서(蔭敍)로 등용된 뒤 동궁위(東宮衛)를 거쳐, 장군으로 동북국경을 지킨 뒤 대장군이 되었다. 음서제도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중신 및 양반의 신분을 우대하여 친족 및 처족을 과거(科擧)와 같은 선발 기준을 적용하지 않고 직접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이다.

1216년(고종 3년)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던 거란의 일부가 몽고군에 쫓겨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왔다. 이때 김취려 장군은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가 되어 조양진(朝陽鎭)과 연주(延州)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자료 : 다음 백과사전).

1217년 거란군 5,000여 명이 제천까지 쳐내려왔다. 김취려 장군은 거란군이 쳐들어 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박달고개를 먼저 차지하였다. 박달고개는 경사가 가팔라서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병력면에서 불리했던 김취려 장군은 대규모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박달재를 미리 차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김취려 장군은 신덕위·이극인 장군을 진중의 왼쪽에, 최준문·주공예 장군을 진중의 오른쪽에 배치하여 거란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자신은 중군을 거느리고 고개위로 올라가 진을 쳤다.

동틀 무렵 예측대로 거란군이 박달고개의 좌우방향으로 올라왔다. 고갯마루에서 미리 포진하고 있던 김취려 장군은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북을 울리면서 공격명령을 내렸다. 잠복하고 있었던 고려의 병사들은 유리한 고지에서 적들을 향하여 일제히 화살을 쏘고 결사적으로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대패한 거란군은 평창을 거쳐 대관령을 넘어 강릉에서 원산, 흥남을 거쳐 여진 땅으로 도주하였다. 박달령 전투의 승리로 전재의 피해가 제천이남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자료 : 현지 안내문).  

김취려 장군을 기리기 위한 역사관이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사랑이야기로 이름난 박달재 고갯마루(충북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에 조성되어 있다. 박달재 표석 뒤의 휴게소 언덕에는 장군을 본뜬 4개의 석상과 큰 자연석 돌에 "고려 명장 김취려 장군 대첩비"를 새긴 초대형 표석이 서 있다. 그 옆에는 김취려 장군이 말을 타고 칼을 높이 든 채 거란군을 무찔렀던 기개를 표현하는 청동상이 조각되어 있어 장군의 늠름한 기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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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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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첩비표석과 장군의 석상




이 조각상 뒤에는 역사관 및 사찰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는데, 왼쪽의 통로로 들어서면 안국사(安國寺)로 연결된다. 통로에는 죽장망혜(竹杖芒鞋) 차림의 스님상, 달마 또는 포대화상 같은 조각상, 가사적삼을 걸친 남녀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안쪽의 방에는 큰 연등이 달려 있는 가운데, 부처님과 제단이 보인다. 그야말로 초미니 사찰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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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과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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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갓을 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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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상(포대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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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만 찍고는 입구로 나오는데 그때 잡동사니를 판매하는 점포 문이 열리며 나이 지긋한 분이 따끈한 차를 한잔 마시고 가라고 권유한다. 마침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했지만 차 한잔이 그리운 때라 사양 않고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난로 위의 누런 주전자에서 약초를 달인 차를 1회용 컵에 따라 준다. 조금 마셔보니 정말 맛이 일품이다.

글쓴이가 앉아 있는 동안 기념관을 방문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차를 권한다. 아직도 이런 곳에서 차를 권내는 따뜻한 인심은 살아있는 듯 하다. 글쓴이는 체면 불구하고 한잔을 더 얻어 마신다.

이 노인은 자신을 역사관장이라고 했다. 옷은 스님복을 입었지만 머리를 길러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니 자신도 스님이라고 한다. 머리를 기른 것에 대하여 그는 스님이라고 반드시 머리를 반들반들하게 깎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불교의 여러 종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차를 따라 주는 여인은 주방 일을 보는 사람이란다.  

내가 비교적 큰 카메라(캐논 400D)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본 관장은 자신도 학창시절에 서울 도봉산을 내 집 드나들 듯 하며 사진을 10여 년 간 찍었다고 하면서, 사진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소유한 카메라 가격이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진을 좋아하면 돈이 많이 든다는 말을 하면서 웃었다.

그는 사찰의 주지스님으로 일하다가 몇 년 전 봉사활동을 위해 이곳에 와서 김취려 장군역사관장으로 이를 조성하는 사업을 하고 있지만 금년 말까지만 봉사하고 다른 일을 위해 떠난다고 하였다. 아직도 기념관 조성은 진행중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장군의 영정도 바닥에 내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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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려 장군 영정

                    <자료> http://blog.empas.com/leeswc/14109568 

 


박달재고갯마루에는 박달도령과 금봉낭자를 형상화한 각종 장승과 서낭당, 박달재 노래비 등이 서 있다. 더욱이 김취려 장군 역사관에 들러 관장이 주는 따끈한 전통차 한잔을 마시면 속세에 찌든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질 것이다.(2008. 3. 1). 

☞ 가는 길 : 장호원에서 제천을 거쳐 영월로 이어지는 38번 국도를 타고 박달재터널을 통과하기 전 박달재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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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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