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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의 아들인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고종황제의 아버지로 철종이 후계자 없이 죽은 후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조대비와 힘을 합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뒤의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대원군이 되어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을 맡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기 안으로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고, 당색을 초월한 인재등용, 서원철폐, 세제개혁, 법전정비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밖으로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특히 서양세력의 접근에 대해서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통상요청을 거부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는 그들의 침략을 무력으로 저지했었지요. 

 

그러나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근대 문명의 수용이 늦어졌으며, 집권 후반기에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대립하게 되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개혁정치가로, 다른 한편은 극단적인 국수주의자로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지만 어쨌든 고종이 친권을 행사하기 전까지 10여 년 간 당시를 풍미한 인물이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있는 흥선대원군 묘(경기도 기념물 제48호)는

원래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옮겼으며

1966년 4월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긴 것입니다.

 

경춘선 마석역 서쪽의 마석 사거리(롯데마트 방향)에는

흥선대원군 묘를 알리는 문화재 이정표가 걸려 있으며

이 이정표를 따라가면 가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폭포로 17번길 안으로  들어서면 거의 외길입니다.

맨드라미와 백일홍이 피어 있는 리우빌라에서 좌측으로 가야 합니다.

승용차를 타고 왔으면 안쪽에 별도의 주차장이 없으므로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해야 합니다.

 

믿음공예를 지나면 자동차 출입금지 철문입니다.

이곳에 1-2대의 자동차 주차가 가능하지만 교행차량이 있을 경우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여기서도 천천히 약 10분을 걸어가면 흥선대원군 묘입니다.

 마석사거리 인근 흥선대원군 묘 안내이정표

 


 폭포로 17번길 이정표

 

 리우빌라 앞의 맨드라미

 

 백일홍

 

리우빌라 앞에서 좌측으로 묘 가는 길

 

 믿음공예 지나 자동차 통행금지철문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 뒤로 묘역이 보입니다.

그래도 후손들이 묘지를 잘 관리하는 듯 주변은 말끔합니다.

 

묘역 우측에는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라는 대형표석이 있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묘역은 조선시대 능원제도(陵園制度)를 따르는 듯 하나

임금이 아닌 대군(大君)에 맞도록 간략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묘는 호석으로 둘러싸인 봉분과 그 둘레에 석호(石虎), 석양(石羊) 각 1쌍이 있고,

그 바깥에 곡담(담장)이 둘러 쌓여 있으며, 묘 앞에는 상석이 있습니다.

 

밑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望柱石),

문인석, 석마(石馬)가 좌우에 각 1쌍이 있고,

묘 앞 중앙에는 방형의 장명등이 놓여져 있습니다.

(2014. 9. 2)

 묘지 입구

 

 신도비(?)

 

 묘소 전경

 

 

 

 

 

 국태공원소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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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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