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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 골짜기에 위치한 자재암(自在庵)은
신라 무열왕 1년(654) 원효 스님이 창건한 천년고찰입니다.

그 후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광종(974))과 의종(1153) 때 중창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초기에는 태조의 원당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오다가
그 후 폐허가 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후기 들어와 고종(1872) 때 퇴락한 자재암을 중창하였으며
대한제국시절인 1907년 화재로 만월보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어
2년 후 다시 중창하였습니다.


근세에 들어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것을 1961년부터 1985년까지
중창을 거듭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거듭났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속리교 왼편에 원효폭포와 원효굴이 있습니다.
폭포는 건기라 물 한방울 보이지 않는군요.
속리교를 건너 좌측의 108계단을 오르면 자재암입니다.

 자재암 일주문

 

 

 

 

 

 속리교

 

 원효폭포와 원효굴 

 
 

가는 길목에는 해탈문이 있는데
문루에 종을 달아놓아 누구든 울릴 수 있습니다.
해탈문 옆 원효대는 원효대사가 수행 중 자살하려고
뛰어 내리려던 순간 도(道)를 깨우쳤다는 장소입니다.

 

 해탈문

 

 

 원효대

 

 

 

원효대에 서면 맞은 편 관음봉이 코앞인데
원효대사가 수행하던 중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는
설화가 있어 관음봉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원효대에서 바라본 관음봉

 

 


자재암에서 입적한 추담선사(1898-1978)의 공적을 기리는
부도탑과 공덕비를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 극락교를 건너면 
골짜기의 경사면에 자리 잡은 자재암입니다.
역사와 명성에 비해 지리적인 제약으로 인해 규모는 매우 아담합니다.

 추담선사 부도탑과 공덕비 

 

 


 
종무소 옆에 대웅전이 있는데, 스님 한 분이 직접 불공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보물 제1211호인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책의 일종)가
있다고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자재암 종무소

 

 

 

 대웅전

 

 

 

 

 

 


독성암(원효암)의 바위굴인 나한전에도 스님이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웃한 원효샘은 차(茶)의 달인인 원효스님이 인정한 명수(名水)였다고 합니다. 
이 약수는 만병통치의 소문이 퍼져 음력 삼짓날(3.3)에는
물을 마시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답니다.  

 나한전

 

 나한전 내부

 

원효샘

 

 

 

 

소요산과 자재암은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의 전설이 깃든 산이기도 합니다.
일주문으로 진입하는 곳에는 요석공원이 있으며
공주봉(526m)은 소요산 남쪽 첫 봉우리로서 자재암을 창건하고
수행하던 원효스님을 찾아온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과 함께
산 아래에 머물면서 남편을 사모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원효스님은 34세에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온 바로 그 인물인데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합니다.  

 

 

◆ 원효스님과 관음보살의 설화(자료 : 자재암 홈페이지)

 

자재암에는 원효 스님이 관음보살을 만나 자신의 수행력을 인증 받았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원효 스님이 요석공주와의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오로지 수행일념으로 이곳을 찾아 초막을 짓고 용맹정진 하던 때였다. 어느 폭풍우 치는 깊은 밤 선정에 든 원효 스님은 자신의 존재마저 아득함을 느끼며 무서운 내면의 갈등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때 밀려오는 폭풍우 소리에 섞여 황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여자의 음성이 들려 순간 원효스님은 눈을 번쩍 떴다.


"원효 스님, 원효 스님, 문 좀 열어주세요"

스님은 망설이다 문을 여니 비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면서 방안의 등잔불이 꺼져버렸다.
"스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찾아와서…하룻밤만 지내고 가게 해주세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를 맞고 서 있는 여인을 보고도 스님은 선뜻 들어오란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여인의 간곡한 애원에 스님은 여인을 토막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스님은 화롯불을 찾아 등잔에 불을 옮기자 비에 젖어 와들와들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여인을 보지 않으려고 스님은 눈을 감았지만 비에 젖어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스님,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 몸 좀 비벼 주세요."

 

여인의 아름다움에 잠시 취해 있던 스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 내 마음에 색심이 없다면 이 여인이 목석과 다를 바 있으랴."

그리고는 여인을 안아 침상에 눕히고 언 몸을 주물러 녹여 주기 시작했지만, 풍만한 여체를 대하자 스님은 묘한 느낌이 일기 시작하여 순간 여인을 침상에서 밀어냈다.

 

"나의 오랜 수도를 하룻밤 사이에 허물 수야 없지. 해골은 물그릇으로 알았을 때는 그 물이 맛있더니, 해골을 해골로 볼 때는 그 물이 더럽고 구역질이 나지 않았던가. 일체만물이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였으니 내 어찌 더 이상 속으랴."

 

스님은 여인을 목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여인으로 보면서도 마음속에 색심이 일지 않으면 자신의 공부는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다시 여인에게 다가가서 여인의 몸을 비비면서 염불을 하였다. 여인의 풍만한 육체는 여인의 육체가 아니라 한 생명일 뿐이었고 스님은 마치 자기 마음을 찾듯 준엄했다. 여인의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린 여인은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스님 앞에 일어나 앉았다. 순간 여인과 자신의 경계를 느낀 스님은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스님은 간밤의 폭우로 물이 많아진 옥류천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무한한 희열을 느끼고 있는데, 여인도 목욕해야겠다며 옷을 벗고는 물속으로 들어와 스님 곁으로 다가왔다. 아침 햇살을 받은 여인의 몸매는 눈이 부셨고 스님은 생명체 이상으로 보이는 그 느낌을 자제하고 항거했다.
"너는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호호호, 스님도. 어디 제가 스님을 유혹합니까? 스님이 저를 색안으로 보시면서..."

 

순간 큰 방망이로 얻어맞은 듯한 혼돈이 일어났고,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 스님의 귓전을 때렸다. 스님은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을 거듭거듭 뇌이면서 서서히 정신을 차리자 폭포소리가 들리고 캄캄했던 눈앞의 사물이 제 빛을 찾고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옳거니, 바로 그거로구나. 모든 것이 그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는 그 도리!' 스님은 물을 차고 일어나서 발가벗은 몸을 여인 앞에 아랑곳없이 드러내며 유유히 걸어 나왔다.

 

心生則種種法生(마음이 생겨 가지가지 법이 낳은 것이니)
心滅則種種法滅(마음이 멸하면 또 가지가지 법이 없어진다)

 

원효의 이 말에 여인은 미소를 머금고 어느새 금빛 찬란한 후광을 띤 보살이 되어 폭포를 거슬러 사라졌다. 그 여인이 바로 관세음보살임을 이내 깨달은 원효스님은 더욱더 수행에 전진하는 한편,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그곳에 암자를 세우고 자재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 [출처]『양주군지』(1978년, 양주군, 양주군지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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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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