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그 5월이 열리는 첫 주말, 최근 철쭉명산으로 잘 알려진 봉화산을 찾았습니다. 물론 봉화산(920m) 정상부근의 대규모 철쭉군락지는 이제 막 개화하기 시작했지만, 남쪽 주능선인 복성이재와 치재 중간의 고지에 피어 있는 만개한 철쭉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벅찬 감동을 듬뿍 안겨 줍니다.
등산버스가 19번 국도를 타고 장수를 지나 번암에 이르러 좌측으로 돌아 꼬불꼬불한 산복도로를 따라 백두대간 고갯마루까지 치고 오릅니다. 점점 고도를 높이자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줄지어 선 곳의 언덕엔 붉게 물든 철쭉이 무리를 지어 피어 있어 등산버스 안은 환호성으로 가득합니다. 특히 바로 위 산정에 붉은 물감을 칠한 듯이 보이는 철쭉 군락지를 보고 사람들은 큰 기대로 마음이 설렙니다.
오늘의 산행 들머리인 복성이재(11:38). 좌측의 이정표를 보고 안으로 들어섭니다. 가야할 중재까지는 12.1km입니다. 숲으로 이어지던 등산로는 첫 번째 봉우리가 가까워지자 철쭉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느라고 가다서다를 반복하지만 이는 오로지 서막에 불과합니다.
복성이재 이정표
올려다 본 철쭉군락
철쭉 너머로 보이는 흥부마을
드디어 봉우리에 올랐습니다(11:58). 산행을 시작한지 불과 20분만입니다. 그 곳의 북쪽과 북서쪽 사면엔 글쓴이가 지금까지 한 경험에 비추어 철쭉이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으로 피어 있습니다. 몇 년 전 찾은 바래봉은 시기가 너무 일렀고, 황매산은 너무 늦었기 때문에 그 절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찾아 온 것입니다.
남원군에서 달아둔 철쭉축제를 알리는 대형 고무풍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눈에 뜨입니다. 장엄한 철쭉에 취해 이곳이 이승인지 저승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입니다. 무릉도원이 실제로 있었다면 바로 여기일 것입니다.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철쭉이 만개한 모습은 한마디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짧은 영어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판타스틱(fantastic)입니다. 너무나 환상적입니다. 참으로 개화시기를 잘 맞추어 방문했습니다.
정신 없이 카메라셔터를 누르다가 제정신을 차리고 뒤돌아보니 저 멀리 남쪽으로는 동서로 뻗은 지리산의 산줄기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동으로는 천왕봉, 서로는 반야봉이 분명하며, 첩첩이 늘어진 산 그리메가 보입니다. 하늘은 잔뜩 흐려있지만 이외로 조망이 잘 되는 편입니다.
마냥 산봉우리에 서서 감동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철쭉 밭에 푹 빠지고 싶은 심경을 접고 북쪽으로 조성된 길을 따라 내려섭니다. 철쭉 군락지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려니 더 큰 감동이 밀려옵니다.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철쭉 사이를 통과합니다.
봉화산 철쭉은 대개 5월 중순 만개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는 정상인 920고지 부근의 철쭉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철쭉제는 이미 5월 2일 시작되었습니다. 철쭉사이를 가다가 약간만 자세를 낮추면 바로 철쭉터널입니다. 머리 위로 철쭉이 춤을 춥니다. 사방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화사한 철쭉뿐!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환희가 가득합니다.
철쭉 뒤로 보이는 가야할 봉화산의 정상
경북 군위군 소재 인각사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한 곳입니다. 그곳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어 이런 장관을 보게 되는 것이지 죽고 나면 모두가 헛것일 테니까요. 오늘 아침 일찍 새벽잠을 설치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오늘 하루를 헛되이 보낸 것이 아니라 매우 보람되고 알차게 보낸 사람들입니다.
북쪽 사면을 내려와 뒤돌아보니 위쪽에서 내려다 볼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입니다. 한마디로 철쭉의 바다입니다. 지리산 자락의 바래봉 철쭉에 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에야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는 곳! 전국의 철쭉 명산인 황매산, 소백산, 두위봉의 명성에 결코 뒤지지 않을 장관입니다. 선행을 한 사람을 보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고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당연히 꽃입니다.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길 따라 치재와 꼬부랑재를 지나 봉화산으로 접근하면서도 뒤돌아서면 지나온 철쭉의 군락지가 바라보입니다. 등산로 곁에 간간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철쭉도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충분히 주목을 받았을 테지만 철쭉의 바다를 헤엄쳐 온 탓에 모두 그냥 지나칩니다.
오른쪽엔 「흥부전」의 주인공 흥부의 고향으로 알려진 성리마을이 있는데, 「흥부마을」로도 불리는 곳입니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만에 봉화산(920m) 정상에 도착합니다(13:18). 사람의 키 만한 거대한 표석이 반겨줍니다. 전북 남원시와 장수군 그리고 경남 함양군의 경계에 솟은 봉화산은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옛날 봉화대가 있던 곳인데 봉화대는 없어지고 이름만 남은 산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방팔방으로 조망이 잘 됩니다.
동남쪽의 지능선 상의 헬기장은 등산객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지리산의 연봉이, 그리고 지나온 철쭉동산의 우측으로는 장수 팔공산이 우뚝합니다. 북쪽으로는 가야할 능선이 뻗어 있는 가운데 장안산(1,237m)과 백운산(1,279m)이 산머리를 내밀고 있습니다.
산불감시초소 뒤로 보이는 지리산 능선
봉화산 북쪽의 대간 능선
봉화산 정상주변의 철쭉은 이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오늘 이 산을 찾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복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지나온 철쭉 동산을 선물로 내리고 정상주변은 다음에 방문할 사람들을 위해 아껴둔 것입니다. 해발고도의 차이에 따라 개화시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합니다.
북쪽능선 길 따라 발걸음을 옮깁니다. 능선이 부드럽고 조망이 좋으며 자주 철쭉이 반겨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철쭉과 조팝나무가 화사하게 꽃을 피운 능선 길을 따라 걷는 재미가 매우 쏠쏠합니다. 하늘이 흐려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도 산길을 걷기에는 안성맞춤입니다. 다만 등산로 곳곳은 최근의 가뭄 탓인지 흙먼지가 날릴 정도로 푹신한 것이 옥의 티입니다.
조팝나무
북쪽의 장안산(좌)과 백운산(우)
철쭉도 참 종류가 많은 듯 합니다. 일반적인 철쭉 외에도 흰빛에 가깝거나 연분홍 철쭉은 더욱 화사하고 청초한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꽃을 보면 이다지도 마음이 맑아지고 차분해 질까요!
광대치를 지날 무렵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오늘은 왜 이렇게 잘 맞는지 모를 일입니다. 기상예보가 틀리기를 원하면 맞고, 맞기를 바라면 틀리는 것을 보면 기상청은 청개구리를 닮았습니다.
월경산(982m)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합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월경산의 답사는 생략합니다. 중재에 이르러 오른쪽 마을로 내려섭니다. 애기똥풀이 지천으로 피어 있고, 쥐오줌풀과 미나리냉이도 간간이 보입니다.
한가로운 풍경의 농촌 들녘엔 모내기를 하기 위해 논에 물을 댄 모습이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입니다. 개울을 건너 등산버스가 기다리는 백운초등학교에 도착해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합니다(16:42).
애기똥풀
쥐오줌풀
미나리냉이
오늘 답사한 복성이재와 중재구간(거리 12..1km)은 백두대간 제3구간 제7소구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루 산에 나와 백두대간 한 구간도 답사하고 또 생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환상적인 철쭉의 화원을 감상한 것은 큰 보람입니다. 하산을 하고 나니 제법 옷이 젖을 정도로 비가 내리지만 오늘 이룬 감동에 비하면 이는 매우 사소한 일입니다.
《산행 개요》
△ 산행일자 : 2008년 5월 4일(일)
△ 산행거리 : 약 15km
△ 산행시간 : 5시간 4분
△ 산행구간 : 복성이재-철쭉군락지-치재-꼬부랑재-봉화산정상-양지재-
광대치-월경산삼거리-중재-백운초교
△ 안내산악회 : 안전산악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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