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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포병학교 제34기수료기념(1970. 6. 6)



지금으로부터 39년 전, 나는 논산연무대 육군 제2훈련소에서 6주간의 기본교육을 마쳤다. 훈련병들은 후반기교육을 가게되면 또다시 고된 훈련을 받아야하므로 제발 차출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게도 나에게 광주소재 육군포병학교로 입교하라는 명령이 났다.

포병학교에 들어가자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일상의 대화를 소리를 지르며 악을 쓰는 일이었다. 왜냐 하면 포병은 대포가 날아다니는 가운데 말을 해야 하므로 보통 음성으로 대화해서는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의사전달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도보나 점호 시 구령도 "하나, 둘, 삼, 넷, 오, 여섯, 칠, 팔, 아홉, 공"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처음에 쉬었던 목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트이기 시작했고, 낮의 학교생활은 정해진 교과목을 배우고 훈련하는 것이라 오히려 논산훈련소보다는 지내기가 훨씬 수월했지만, 문제는 야간 특히 점호 때 기합이 매우 심한 것이 흠이었다.

기합의 종류도 무척 많았다. 볼펜을 턱밑에 끼우고 떨어뜨리지 않고 오래 버터야 하는 기합을 받으면서도 침상 맞은 편에서 병사들이 볼펜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고, 웃으면 턱의 조임이 풀어져 볼펜이 침상으로 떨어지게 되고 이 경우 매를 맞아야만 했다.

또 양어깨를 뒤로 젖혀 어깨쭉지 사이에 볼펜을 끼우는 기합도 정말 어려웠다. 더욱이 소위 팬텀기 타기라는 것은 철모를 침상에 바로 놓고 가슴을 철모에 대고 양손과 발을 들어 흡사 전투기가 날아가는 것과 같은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으로서 기합 중에서 제일 힘든 일이었다. 머리를 거꾸로 박는 원산폭격은 너무 기본적이어서 기합 축에도 들지 않았다.  

한번은 야간에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기상하라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옷이라고는 팬티만 걸쳤다. 그기에 철모를 쓰고 탄띠를 허리에 찬 채 연병장에 집합하니 부대 구대장(소대장에  해당)이 나타나 어떻게 병영에서 도난사고가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며, 이는 병사들의 정신자세가 썩어빠졌기 때문이라는 일장연설을 한 후 기합을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기합이라는 것이 병사들을 사각형으로 간격없이 촘촘히 세우고는 쪼구려 뛰기를 시키는 것이었다.

단순한 쪼구려 뛰기 기합은 사실 논산훈련소에서도 심심하면 받아 보았으므로 별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흙이 마른 운동장에 수십 명의 명사들이 빽빽이 모여 앉아 쪼구려 뛰기를 시작하자마자 피어오르는 흙먼지로 숨이 막혀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군 입대 후 수많은 기합을 받아보았지만 숨을 쉴 수가 없어 그토록 참기 힘든 기합은 없었다. 고통의 순간이 지나가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니 정말 밥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기라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매주 토요일 내무사열을 받기 위해 군화 밑창에 남아 있는 흙 등 이물질을 바늘로 파낸 기억을 하면 지금도 쓴웃음이 나온다.

지옥 같은 7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제34기로 졸업(1970. 6. 6)을 하고는 다른 부대로 배속되었다. 현재는 육군포병학교가 광주에서 전남 장성으로 이전하여 운영된다고 하는데, 병사들의 생활이 어떤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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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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