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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포병학교에서 받은 헛된 훈련

나는 육군사병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1970년 2월 입대하여 1973년 1월 제대하였으므로 34개월 23일간 복무하였다. 나는 논산훈련소 30년대를 마치고 후반기 교육기관 중 군기가 가장 엄하다는 광주소재 포병학교로 차출되어 후반기교육을 받았다. 7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퇴교할 날이 왔다. 훈련소가 아닌 학교이기 때문에 병사들의 훈련성적은 개인별로 기록되었고, 졸업할 때 나는 2등을 하여 소위 그 당시 배정된 부대 중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1등을 한 친구는 전라도 출신이라 광주소재 31사단배치를 희망하였고, 나는 두 번째로 안동 소재 36사단을 선택했으며, 3등을 한 친구는 전주의 34사단을 골라 1∼3등에게 주어지는 예비사단 골라잡기는 끝나고, 나머지는 모두 101보(서부전선)와 103보(동부전선)로 강제 배속되었다.    
          
36사단 배속 명령서를 들고 안동의 보충대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동해안 파견근무명령이었다. 때는 1970년 6월, 1968년 1월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습격 미수사건에 이어 1968년 말에는 울진·삼척지구에 대규모 공비침투사건을 계기로 동경사(동해안경비사령부)가 창설되었고, 그 부대병력이 부족하여 보충대로 오는 신병은 주특기에 관계없이 모두 도매금으로 동해안으로 보내졌다. 광주에서 받은 7주간의 포병통신훈련은 무용지물이었다. 군대에서의 교육과 경험은 모두 "도로묵"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고된 취사병과 보초병 신세

나는 울진에 있는 대대본부에서 중대로, 중대에서 소대로, 소대에서 분초가 있는 최 말단 단위 부대까지 흘러가 제일 처음 맡은 보직이 졸병에게 주어지는 취사병이었다.

그런데 취사병이라면 취사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취사뿐만 아니라 주간과 야간에 해안보초까지 서야 했으니 그야 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보초근무는 야간 3교대제였다. 여기서 3교대라는 것은 하루 밤에 한사람이 경계근무를 세 번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두 시간 경비근무를 하고 들어와 두 시간을 쉬는데, 분대초소에서 가까운 곳은 고참들의 차지이고, 졸병들은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야 했으므로 근무지까지 가는 데 20분 내지 30분이 소요되고, 교대 후 분초로 돌아오는데 같은 시간이 걸려 실제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남짓하였다.

 

교대 보초병을 깨우기 위해 다리를 밟아

일단 잠이 들면 불침번이 교대 근무자를 깨워도 잘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자는 사람을 강제로 일으켜 세우거나 다리를 지근지근 밟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이렇게 밤에 시달리고 나면 오전 중에는 취침을 하는데 졸병은 분초 주위에서 또 보초를 서야하고, 나 같은 경우에는 취사를 담당해야 했으니 졸병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히도 먼저 배속된 병사 중에서 군번을 비교해보니 나와 비슷한 친구가 둘 있었는데 이들은 논산 훈련소를 마치자마자 바로 부대로 배치된 사람들이었다. 과부사정은 과부가 제일 잘 안다는 말이 있듯이 졸병인 우리들은 말을 서로 터면서 몇 달 동안 정말 친하게 지냈다.
   


목이 터져라 외친 "보초근무 중 이상 무!"

때는 1970년 여름, 야간보초도 3교대로 고달팠지만 주간보초도 죽을 지경이었다. 우리 분초가 있는 경계지역 중 한 곳은 근무지역이 야트막한 야산 꼭대기였다. 앞에는 울진 앞 바다의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는 곳, 뒤에는 비포장 도로가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보초근무를 위해 야산 꼭대기에 오르면 보초들은 정작 해변보다는 도로변을 더욱 주의 깊게 관찰해야 했다. 왜냐하면 도로에는 수시로 근무상태 점검을 위해 대대장(소령)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다녔기 때문이다.

멀리서 대대장의 오토바이가 보이면 보초들은 벌써 긴장하기 시작한다. 온 정신을 집중하였다가 아래로 지나가면 "받들어 총!" 자세로 인사를 해야만 했다. "보초 근무 중 이상 무!" 그런데 만약 보초의 목소리가 작으면 대대장의 질책이 떨어졌다. "야, 이 새x야, 밥 안 먹었어? 너 죽으려고 환장했어?" 때로는 여러 번 반복해서 구호복창을 시켰기 때문에 나중에는 목이 아파 온다. 일개 소령에게 당한 졸병들의 설움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다.

 

무수한 별들을 보던 시절

그로부터 33년의 세월이 흐른 2003년 말, 글쓴이는 국방대학교 안전보장대학원 안보과정을 졸업했다. 졸업식장의 단상에 올라있는 별을 헤어보니 모두 23개였다. 합참의장(대장)과 삼군참모총장(대장 3명), 국방대총장(중장)과 부총장(소장), 두 대학원장(준장 2명)이 참석하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많은 별들을 보고도 그냥 덤덤했는데, 군 생활당시 소위나 대위 등 위관장교와 소령 등 영관장교가 왜 그리 높게 보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쓴웃음이 나온다.

                       국방대 안보과정 입학식(졸업식과는 달리 중장인 학교장 주관으로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일러두기>

현재 다음뷰에는 <가츠의 군대이야기>가 인기짱이다. 비록 최근의 일이지만 블로거 <악랄가츠>님은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반전이 많아 여러 사람의 공감을 받고 있다. 그에 비하면 필자의 이야기는 매우 오래 전(37년~39년) 일이고 또 이를 재미있게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군대생활의 한 측면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앞으로 기회 있을 때 5-6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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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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