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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교동소재 표충사(表忠寺)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절의 이름을 죽림사로 하였다가 영정사로 바뀌었고, 신라와 고려에 걸쳐 보우국사 및 일연선사 등 많은 고승들이 머물렀다. 특히 표충사는 임진왜란 당시에 승려로서 조국을 구한 사명대사의 유적지로 의승 대장인 서산, 사명, 기허 등 3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표충서원을 사찰 안에 둠으로써 사명(寺名)을 표충사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자료 : 표충사 안내서)  
    
천황산과 재약산을 종주하는 산행을 마치고 표충사계곡으로 하산한 시각은 오후 다섯시가 지난 후였다. 산골이라 이미 주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사진을 정상적으로 찍을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ISO를 최대한 올리고(1600), 조리개를 개방하여 사진을 찍었지만 노출부족으로 흔들린 사진이 많다.

표충사의 정문역할을 하는 수충루에는 표충사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왼쪽에는 표충사(表忠祠)의 사당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사천왕문을 지나니 삼층석탑(보물 제467호)이 반겨준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7.7m의 석탑이다. 1995년 해체보수당시 나온 유물은 탑과 표충사의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쪽에는 영정약수(靈井藥水)가 있다. 이의 유래를 살펴보자. 신라 흥덕왕 4년(829) 셋째 왕자가 불치병에 걸려 왕의(王醫)들의 치료를 받았으나 효험이 없어 고민하던 중 이곳 죽림사(표충사의 전신) 선인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치료를 받은 지 1년 만에 완치되었다.




왕이 친히 선인을 찾아와 칭송하니 서인이 말하기를 이것 산초(山草)와 유수(流水)가 약초요 약수라 하였다. 왕이 감탄하여 산 이름을 재약산, 절 이름을 영정사, 물을 영정약수라고 명하고 탑과 대가람을 세웠다.

글쓴이는 오늘 산행을 하며 재약산(載藥山)이라는 산 이름이 무척 궁금하였는데 여기 표충사의 약수터에 와서 비로소 해답을 얻었다. 지금도 이 약수를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500mm 생수통에 물을 받아 마시기를 참 잘했다.

약수터 위를 오르면 본당이 대광전이다. 일반적으로 대적광전 또는 대웅보전이라고 하는데 대광전이라는 이름은 처음 본다. 단층 팔작 지붕에 목조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건축이다. 숙종 때 불 탄 후 다시 지어진 것이다.








같은 경내에 팔상전(석가모니부처님의 일대기), 명부전(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 관음전(관세음 보살을 모신 전각), 범종각이 있다. 

관음전(좌)과 명부전(우)





사위가 어두워져서 재약산을 비롯한 주변산군을 배경으로 멋진 모습을 담지 못하여 못내 아쉽다. 
   

사명대사와 임진왜란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서산대사 휴정의 뒤를 이어 팔도승군도총섭이 되어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하셨으며 왜장 가또오의 진중을 3차에 걸쳐 방문하여 화의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탐지했다.

그리고 방어체제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영남지방의 팔공, 용기, 금오산 등지에 성을 쌓고 군량과 무기를 갖추어 방어태세를 정제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표충사에 주석, 천황산 사자평에서 많은 승병을 모아 훈련시켰다.

 

땀흘리는 표충비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 대사의 충훈을 기리기 위해 출생지인 경남 밀양시 영취산 백하암 자리에 표충사라는 사당을 지은 것은 1618년(광해군 10년)의 일이다. 그 뒤 1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는 사당 표충사를 중창하는 동시에 대사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이 비가 바로 그 유명한 땀을 흘리는 비이다.(이 비의 소재지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홍제사로 표충사와는 다르다). 



예전의 것들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던 한 아낙이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의 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아낙이 남편과 함께 관가에 고했는데, 당시 비석이 흘린 땀은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에도 군지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한일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15해방, 6·25동란, 4·19혁명, 5·16군사 쿠테타 때 등 모두 여섯 번이나 땀을 쏟았다는 것이다. (자료/ 다음 전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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