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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왕릉하면 경주에 산재해 신라왕들의 무덤이 떠오른다. 봉분을 동산처럼 크게 하고 잔디를 심은 모습니다. 조선의 5백년 도읍지였던 서울과 수도권의 왕릉도 커다란 봉문이 특색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무덤 대신 길거리의 서낭당처럼 돌무더기로 쌓은 왕릉이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소재 가락국(駕洛國)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의 돌무덤(石塚)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는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차장을 지나면 계곡 안쪽에 석축이 보인다. 홍살문과 솟을 대문을 지나면 왕릉이다. 쌓여 있는 돌무덤이 참으로 신기하다. 무덤 앞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돌짐승이 1쌍씩 배치되어 있으나 이 석물들은 근래의 작품으로 돌무덤과는 시대적 차이가 많다고 한다. 

왕릉 입구

홍살문

석 축

왕릉진입 솟을대문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 『가락국호왕릉(駕洛國護王陵)』이라고 새긴 돌비석이 있다.





 

이 무덤은 층단(層段)을 이루는 방형(方形)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경사면에 축조하였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후면으로 갈수록 경사져서 층의 높이에 따라 체감되고 있다. 꼭대기는 타원형으로 되었고 전면 중앙에서의 전체 높이 7.15m이며, 제4단 동면에 너비 40cm 내외, 높이 40cm 내외, 깊이 68cm 내외의 감실이 개설되어 있다.(자료 : 현지 안내문). 

흔히 구형왕릉 앞에 "전(傳)"자를 붙이는데 이는 "구형왕릉 무덤이라 전한다"는 뜻일 뿐 거대한 돌무더기가 무덤인지 석탑인지도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구형왕을 양왕으로 부르는 이유는 신라에 나라를 넘겨주었기 때문인데, 일설에는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 속에 묻히겠는가. 돌로 덮어 장사 지내 달라”는 왕의 유언에 따라 병사들이 임금의 시신을 매장하고, 그 위에 잡석을 하나씩 포개었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구형왕은 신라에 투항한 후에도 30년을 더 살았다 하여 이 이야기조차 크게 신빙성은 없다.(자료 : 월간 마운틴 2005년 10월호).




구형왕릉은 여전히 전설에 싸여 있으며, 그 주인은 지금도 왕산(923m)을 오르는 등산객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 가는 길 : 통영대전간 고속국도 생초IC를 빠져 나온 후 임천강을 따라 가다가 좌회전해 덕양전, 망경루, 왕림사를 지나면 대형 주차장이다.(2008.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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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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