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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1852-1919)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입니다. 25대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성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익선군에 봉하고 나이12세에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어리다 보니 초기 10년간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였고 대원군이 물러나자 민비를 중심으로 한 친족일가가 정권을 독점했습니다. 재위 중 강화도조약, 갑오개혁, 을미사변, 을사늑약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대내외 정세 가운데,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후 1910년 왕으로 격하되어 강제로 유폐되었고 1919년 1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고종은 즉위 초에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력 속에서, 친정을 시작한 후로는 민씨 척족의 전횡 속에서 자신의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세계열강들의 이권다툼 와중에서 조선의 주권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1895년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으로 쳐들어와서 부인인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1896년 경복궁을 탈출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그 후 공사관을 나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 행위를 세상에 알리려고 1907년 헤이그밀사를 파견하는 등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고종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의 구세군 중앙회관에서 구 러시아 공사관이 있는 정동공원까지 약 120m의 길을 말합니다. 이 길은 1896년 아관파천(구한말인 1896년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당시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을 오갈 때 사용한 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추정된다는 표현을 한 것을 보면 역사적으로 고증이 되지 않은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언론보도자료를 보면 고종의 길을 잘못 복원해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 대목이 있거든요. 전문가들은 실제로 고종은 “복원된 고종의 길“을 걷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아무튼 필자는 고종의 길로 추정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최근 개관한 서울도시건축박물관과 덕수궁 사잇길로 들어가면 주한영국대사관입니다. 중간에 길이 막혀 덕수궁 안으로 살짝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하더군요.

 세종대로의 주한영국대사관 이정표

 

 

 

 

조금 가면 고종의 길을 만납니다. 입구에 안내문이 세워져 있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기와 담장을 새로 조성해서인지 너무 깨끗하고 산뜻해 보이는 게 어색했습니다. 거리가 120m밖에 되지 않으니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단박 끝납니다.

 

 

 

 

 

 

 

 

 

 

 

 

정동근린공원으로 나오면 언덕 위에 백색의 탑 같은게 보이는데, 이는 구러시아 공사관으로 6.25전쟁 때 대부분 파손되고 남은 3층 전망탑입니다.

 

 

러시아공사관 전망탑 

 

 

 

 

 

 

 

정동근린공원에는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걸어온 역사적인 발자취를 패널로 제작해 전시해 두었는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을씨년스럽다는 말도 1905년(을사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을 계기로 사용된 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동근린공원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나오면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입니다. 덕수궁 돌담길에서는 정동근대역사길 조성이 한창이더군요. 아무튼 다소 논란이 된 고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민비의 친족정치로 국내 정치가 엉망이었고,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다툼 속에서 우리는 치욕적인 한일합방을 맞이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북한핵과 이웃한 일본 및 중국의 팽창정책으로 인해 매우 어려운 시기인데 위정자들이 이를 잘 극복해 후손들에게 빛나는 조국을 물러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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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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