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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오산시 외삼미동 소재 죽미령 평화공원은 6·25 발발 10일 만인 1950.7.5. 북한군과 유엔군 지상군(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이 첫 교전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던 죽미령에 조성된 역사공원으로 6.25 전쟁 70주년인 2020년 개장했습니다.

 

이곳에는 1955년 미 제24사단에 의해 세워진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 1982년 확장 개수된 신 유엔군 초전기념비, 2013년에 건립된 유엔군 초전기념관, 2020.7월에 개관한 스미스 평화관이 있으며, 전망대와 잔디마당 및 평화놀이터 등 방문객들이 6.25를 상기하면서 여가를 보낼 수 있도록 조성하였습니다.

 

 

이 평화공원은 “전쟁의 시작에서, 평화의 시작으로”를 기치로 유엔군 초전이 한반도 평화와 자유 수호의 첫 번째 역사였음을 가치 있게 재조명하는 한편, 감사와 추모를 넘어 평화적인 미래로 나아갈 때 희생의 가치가 더욱 빛날 것이라는 비전 아래 평화문화 플랫폼으로써 조성된 것입니다.

 

 

 

 

 

스미스 평화관으로 입장하기 전에 먼저 죽미령 전투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 6시간 15분간의 죽미령 전투▲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고개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7월 5일 새벽 3시, 빗속을 뚫고 죽미령 고개에 도착한 미국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도로와 철로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도로를 포함한 좌측 능선에 B중대를, 철로 좌측 편에 있는 진지 내 우측 고지에는 C중대를 배치하고, 105mm 포대를 죽미령 후방 수청리에 포진시켰다.


오전 7시 수원근처에서 북한의 전차부대의 모습을 드러났다. 8시 16분 첫 사격을 시작으로 스미스 부대는 포탄을 쏘아대며 공격하였지만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오전 10시, 약 10km에 달하는 긴 행렬의 북한군 트럭과 보병이 나타났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보병을 향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고 아군,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그러나 북한군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동시에 전차가 중앙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탄약과 병력이 소진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2시 30분 퇴각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540명 중 보병 150여 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5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는 승패와 관계없이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거나 적어도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 하에 남침을 감행 하였는데, 남침개시 10여 일만에 미 지상군의 참전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유엔군의 파병은 유엔 창설이후 처음으로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펼친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 (자료 : 죽미령 평화공원 홈페이지)

 

 

 

 

죽미령은 오산 북쪽 5km에 있는 조그마한 능선으로 당시에도 경부국도와 철도를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중요한 방어기지였으며, 날씨가 화창하면 북쪽으로 10km 거리의 수원, 남쪽으로는 오산 끝까지 관측할 수 있어 지형적으로 적의 이동을 알아차리기 좋은 위치였습니다.

 

스미스 평화관은 가상현실을 통해 1인칭 시점으로 스미스 부대원이 되어 죽미령 전투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체험관입니다. 현재 체험관이 위치하고 있는 죽미령은 UN군이 첫 전투를 벌인 격전지로 많은 수의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냈던 장소입니다.

주차장 쪽에서 본 스미스 평화관

 

 

체험관 관람개요

 

 

 

 

 

체험관 안으로 들어서면 당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이끌었던 찰스 스미스 중령이 방문객을 맞아줍니다. 먼저 어린이 체험실인데, 이곳에서는 어린이 눈높이에서 당시 6.25를 이해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체험 도구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6.25전쟁 발발이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에 대한 제재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 당시 찬성국은 7개 국가(중국, 쿠바, 에콰도르, 프랑스, 노르웨이, 영국, 미국)였고, 반대 1표(유고슬라비아), 기권 2표(인도, 이집트)로 통과되었으며, 소련대표는 불참하였습니다. 여기서 중국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중화민국(대만)입니다.

 

 

 

 

 

 

 

 

 

당시 유엔군의 6.25전쟁 참전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한국의 체제안보를 위해 공헌한 세계의 지도자들 5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승만(1875-1965) 초대대통령은 안보리의결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트루먼(1884-1972) 미국 대통령은 미군의 6.25참전을 결정했고 통일한국을 위해 북진정책을 주장했습니다. 아이젠하워(1890-1969) 미국 대통령은 6.25전쟁의 조기종식을 위해 노력했으며 이승만이 주장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받아들였습니다. 다크 함마르셀드 유엔사무총장(재임 1953-1961)은 정전협정체결을 지켜보면서 세계평화에 기여했습니다. 맥아더(1880-1964)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수도 서울을 회복한 영웅입니다.

 

 

 

 

 

 

 

 

 

 

스미스 부대원은 1950년 7월 1일 일본 이타즈케 공군기지에서 6대의 더글라스 C-54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대전으로 이동했으며, 대전에서 민간차량을 이용해 오산 죽미령에 도착해 방어진지를 구축한 다음 치열한 교전을 하게 됩니다.

 

 

 

 

 

 

 

 

 

 

 

 

 

 

 

6.25전쟁이후 폐허를 딛고 일어나 발전해 가는 대한민국의 모습과 유엔군의 6.25전쟁지원 참전국 현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고> 유엔군 6.25전쟁 참전국현황

 

 

 

 

 

유로 VR존은 영상을 통해 죽미령 전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6.25전쟁 발발한 후 유엔안보리의 한국전 참전이 결정되고 미군이 오산 죽미령에서 직접 북한군(북괴군)과 교전을 한 것은 단 10일 간에 이루어진 놀라운 기록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용기와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죽미령 평화공원 가는 길

 

수도권전철 1호선 세마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전혀 행인들이 다니지 않아 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황하지 말고 우측으로 가면서 오피스텔 가림막을 따라가면 육교가 나오는데 보도전용육교에 오르거나 육교 밑 좌측으로 가면서 세마지하보도 우측 계단을 올라 1번국도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오케이입니다.

세마역 2번 출구에서 본 세마역

 

공사중인 오피스텔 가림막

 

철교를 가로지르는 보도전용육교

 

세마지하보도 우측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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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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