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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주요전각

 

보물인 양주 화암사지 무학대사탑 및 쌍사자석등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소재 천보산(天寶山, 423m) 남쪽 자락에 위치한 회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고려후기인 충숙왕 15년(1328)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우왕 4년(1378) 나옹(懶翁)선사가 중건한 대가람입니다.

 

그러나 지공이 창건하기 전에도 고려 명종 4년(117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다는 기록으로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지만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고 하네요. 그래서 지공이 큰 사찰로 “창건”했다는 표현 대신 “중창”했다고 기술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회암사는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기에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는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했으며, 세종 6년(1424)의 기록을 보면 회암사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회암사지 추정 복원도(자료/화암사지박물관)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진흥정책을 펼 당시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교를 숭상하는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명종 20년(1565)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습니다. 회암사는 유교사회를 지향하면서 불교를 배척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을 추진했던 조선시대에 왕실의 적극적 후원으로 조선 최대의 왕실사찰로 한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조선 순조 28년(1828) 고의적으로 훼손된 지공과 나옹 및 무학의 부도와 탑비를 다시 중수하였고,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으며,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면서 3대화상인 지공과 나옹 및 무학의 진영을 모셨습니다. 1976년 호선(昊禪)이 큰 법당과 삼성각 및 영성각(影聖閣)을 지었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의 회암사는 옛 회암사의 3대화상 승탑을 지키기 위해 작은 절터에 세워진 공간이지만 3대화상의 승탑과 가람을 수호하고, 수행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삼대화상 중 나옹선사는 우리에게 “청산은 나를 보고”(靑山兮要我)라는 선시(禪詩)로 친근한 큰 스님이기에 그의 시를 여기에 옮겨 적습니다.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양주 회암사지박물관에서 출발해 회암사지공원과 회암사지를 지나면 회암사 입구인데 일주문에는 “천보산 회암사, 양주천하제1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계곡에 조성된 회암사길이 구불구불 이어집니다. 약수터 갈림길을 지나면 화암사의 전각이 보이는데 좌측 주차장 쪽의 기와집은 아마도 템플스테이용 주택 같습니다.

 

회암사 일주문

 

회암사 가는 길

 

 

 

 

 

 

 

 

 

 

 

직진해서 발걸음을 옮기면 축대 위에도 반듯한 기와집이 있는데 이곳에도 현판이 없어 용도를 잘 모르겠지만 기도용 양초 판매를 하고 있더군요. 범종각 아래 컨테이너 박스에는 종무소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진입로 우측 축대 위에는 회암사 중창 불사 공덕비 4기가 세워져 있네요.

 

회암사 중창불사 공덕비

 

 

 

 

 

 

 

기도용 양초 판매안내소

 

회암사 종무소(범종각 아래 컨테이너박스)

 

 

 

 

 

우측 계단을 오르면 조사전입니다. 조사전(祖師殿)은 해당 사찰에서 존경받을 만한 승려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불교 건축물로서 사찰에 따라 국사전, 국사당, 영각, 조사각 등으로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곳 조사전의 중심에는 목조여래좌상이 놓여 있는데 이 불상은 1755년 창평 용흥사 상선암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불상이라고 합니다.

조사전 오르는 계단

 

조사전(우측)

 

 

조사전 내부의 목조여래좌상

 

조사전 우측 불상들

 

 

 

 

 

 

또 조사전에는 무학대사와 나옹선사, 지공선사와 함허당득통대선사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습니다. 무학대사(1327~1405)의 법명은 자초(自超), 속성은 박(朴)씨이며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입니다. 18세에 출가하여 1353년(공민왕 2년)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할 때 인도승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왕사에 책봉되었고, 태조의 명에 따라 회암사에 머물렀으며 1393년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는 수탑(壽塔)을 세운 인물입니다. 나옹선사(1320∼1376)의 시호는 선각(先覺)으로 1347년(충목왕 3년)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 머물며, 4년여를 인도승려 지공에게 수학하였습니다. 후일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한 인물입니다.

무학대사(좌)와 나옹선사(우)

 

 

 

 

 

지공선사(?-1363)는 인도의 승려로 고려에서는 1326년부터 약 2년 6개월간 머물며 회암사는 그가 고려에서 가장 중요시하였던 사원으로서 제자인 나옹이 중창하고 그의 석비와 부도를 세웠습니다. 함허당 득통 대선사(1376~1433)의 초상화가 있는 것은 이외였는데 그는 회암사지와 관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혼돈의 시기를 살았던 고승으로 나옹과 무학대사의 법맥을 잇는 선사로 각종 경전 해설서를 저술하는 한편 유가의 억불논리에 맞서 이를 논파하는『현정론』을 펴냄으로써 불교와 유교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 애쓴 인물이라고 합니다.

지공선사(좌)와 함허당득통대선사(우)

 

 

 

 

 

대웅전 아래쪽에는 범종루가 있으며 대웅전 앞마당은 보수공사 중이어서 주변이 다소 어수선했습니다. 대웅전 내부의 불상도 매우 화려하네요. 대웅전 좌측에는 관음전이 있는데, 관음전(觀音殿)은 관세음보살을 본존으로 두는 사찰의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서는 원통전(圓通殿) 또는 보타전(寶陀殿)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관음전 뒤쪽에는 삼성각이 있습니다.

범종루

 

 

 

앞마당 공사중인 대웅전

 

 

대웅전 내부

 

 

 

 

관음전 내부

 

삼성각

 

삼성각 내부

 

 

 

 

 

조사전 우측 천보산 자락의 능선에는 회암사가 지키려는 3대화상의 승탑과 탑비가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별도로 게재할 예정입니다. 이곳에 있는 문화유산은 국가보물 2점(회암사지 무학대사탑,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3점(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무학대사비)이 있습니다.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무학대사비와 쌍사자석등 및 무학대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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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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