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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 율곡기념관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소재 강릉 오죽헌(보물)은 조선 전기(15세기 중엽) 목조 건물로 단일 주거건축으로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고옥입니다. 오죽헌(烏竹軒)이라는 명칭은 뒤뜰에 검은 대나무가 자란 것을 계기로 붙었으며, 조선의 시인 겸 화가인 신사임당(1504-1551)의 친정집으로 이곳에서 조선의 유학자 겸 관료인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생가입니다.

 

오죽헌 안내도 및 율곡기념관 위치도

 

 

 

 

 

이곳은 1975년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율곡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를 비롯해 자경문, 율곡기념관 등을 신축하고 강릉시립박물관과 통합되어 1998년에 재개관하였으며 경내에는 강릉화폐전시관이 있습니다. 오죽헌 입구에는 “세계 최초 모자 화폐인물 탄생지”라는 조형물이 있어 방문객들은 기념사진을 촬영합니다.

오죽헌 입구

 

 

 

 

 

오죽헌 정문

 

 

 

 

출입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관리사무소가 있네요. 경내는 잘 조성된 공원 같은 분위기인데 우측에 율곡선생의 동상과 친필휘호가 새겨진 석판이 있고 그 안쪽에는 “신사임당 초충도 화단”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중앙광장으로 진입해 축대 위에 있는 자경문(自警門)을 들어섭니다. 자경문은 오죽헌의 안팎을 가르는 문입니다. 자경문을 들어서면 우측 축대 위에 오죽헌 중심건물인 율곡의 사당 문성사, 조선 초기 별당건물인 오죽헌(보물), 그 우측 율곡이 태어난 몽룡실이 있습니다.

공원 같은 오죽헌 경내

 

율곡선생의 동상과 친필휘호

 

 

자경문

 

오죽헌과 몽룡실

 

 

 

 

 

자경문으로 진입해 직진하면 율곡기념관이 있는데 그 옆에는 율곡의 생애를 기록한 율곡선생 행장기가 세워져 있네요. 율곡 이이(1536-1584)는 신사임당의 아들로 조선 중기 이황과 더불어 으뜸가는 학자로 추앙받은 인물입니다.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이며 강릉에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의 가르침을 받았고, 명종 3년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23세 되던 해에 안동 도산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아홉 번 치른 크고 작은 과거시험에서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병조판서 때 일본과 중국의 침략에 대비해 십만양병론을 주창하였고 선조 1년 천추사 서장관(書壯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나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됐으며, 이듬해 49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자료/다음백과 및 현지안내문 참고)

 

 

 

 

 

율곡기념관은 옥산 이우의 14세손 이장희 선생이 신사임당 초충도 병풍 들을 강릉시에 기증하면서 1965년 오죽헌 앞쪽에 건립한 기념관입니다. 그 후 1976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현 위치로 옮겼으며, 2008년 옥산 이우의 16세손인 이창용(현 한국은행 총재)이 신사임당 및 후손관련 유물 566점을 기증함에 따라 2012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축한 것입니다. 이곳에는 율곡 및 율곡과 관련된 인물들(어머니 신사임당, 누나 이매창, 남동생 이우, 이우의 장인 황기로)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율곡기념관

 

 

 

 

 

 

 

 

 

 

먼저 신사임당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는데요.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조선전기 “자리도”, “초충도”, “노안도” 등의 작품을 그린 서화가입니다. 그는 이이의 어머니로서 시화에 능한 예술가로서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 고상한 정신·기백을 드러내는 글씨에 대한 재주가 매우 뛰어 났습니다. 그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개척한 여성입니다. 사임당 작품으로는 채색 “초충도”와 수묵화, “초서”, “전서” 등의 글씨가 전시돼 있습니다.

 

 

 

 

 

 

 

 

 

 

율곡 이이의 유품으로는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술한 『이이 수고본 격몽요결』과 정조대왕이 어람한 뒤 어제어필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 “벼루”, 그리고 그의 저서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신사임당의 맏딸인 이매창(李梅窓 1529~1592)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여성의 규범을 지켰고 경전과 사기에도 능통하였으며 율곡이 크고 작은 일이 있으면 매창의 자문을 받기도 하였고 그림솜씨가 뛰어나 참새, 설경과 새, 달과 새 등 서정적인 작품과 묵매도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매창 작품으로는 “참새” “설경과 새” “당과 새”를 비롯한 서정성이 짙은 수묵화와 조선중기의 묵매양식을 잘 보여주는 “묵매도”가 있습니다.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1609)는 율곡의 동생으로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비안현감, 괴산.고부군수를 거쳐 군사감정에 이르렀고 시(詩), 서(書), 화(畵), 금(琴) 모두를 잘 한다고 하여 4절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포도, 초충, 게, 매화, 난초, 국화 등 다양한 그림과 묵란도, 묵국도 등을 남겼습니다.

 

 

 

 

 

그는 어머니 사임당의 영향을 받아 단아한 서풍을 구사하다가 황기로의 사위가 된 이후로 장인의 서풍을 수용하여 현달하고 방일한 서풍을 선 보였으며, 우암 송시열이 “옥산의 서풍은 정묘하고 웅건하여 용과 뱀이 날아 올라가는 것 같아 글씨를 얻는 자는 값진 보석보다 더 귀중히 여겼다”고 평가했답니다.

 

 

 

 

 

 

 

고산 황기로(1521-1575년 이후)는 율곡의 동생인 이우의 장인으로 조선 전기 과거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술과 글씨 쓰기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16세기를 대표하는 초서의 대가로 자신만의 서풍을 개발해 조선 중기이래의 초서풍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으로는 조선시대 초서의 대가답게 활달하고 분방한 필치를 보여주는 “초서-이군옥 시”와 “초서가행 원석”이 전시돼 있습니다.

 

 

 

 

 

 

 

 

 

 

 

기념관으로 갈 때는 동문인 자경문(自警門)을 이용했는데 나올 때는 남문인 입지문(立志門)으로 나옵니다. 입지문은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의 첫 장인 입지장(立志章)에서 따온 것입니다. 율곡이 42세 때 저술한 격몽요결은 초학자들에게 학문의 방향을 알려주는 유학의 입문서입니다. 입지장은 학문에 뜻을 세우고 정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장(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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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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