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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종택 대문채

 

농암종택의 별당인 긍구당

 

분강서원

 

강각(좌측)과 애일당 (우측)

 

 

 

 

 

▲ 농암종택(농암선생구택)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소재 농암종택은 조선 문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택(宗宅)입니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연산군 4년(1504) 사간원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기도 했지만 중종 때 성주목사를 하며 선정을 펼쳐 왕에게 상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호조참판과 자헌대부에 올랐고, 사망하기 전 중추부지사가 되었으며 저서로《농암집》이 있습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 종택이 있던 분천마을이 수몰됨에 따라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이건(移建)되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이 한곳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2007년 분강서원(汾江書院)이 바로 이웃으로 재 이건되어 지금은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립니다.

 

농암종택 대문채(농암선생구택) 앞에는 농암 이현보와 농암종택 관련 자세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고 대문에는 농암종택건물 배치도가 붙어 있어 정말 편리합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사랑채가 있는데 사랑채의 좌측은 내실, 우측은 사랑방입니다. 사랑채 앞에는 농암의 모친인 권씨부인과 선반가 관련 안내문이 있는데, 농암의 집안은 농암을 비롯해 어머니 권씨부인, 아들 이숙량, 종증손자 이시 등 4대가 우리말로 된 시조작품을 남겼다고 합니다.

농암종택 대문채

 

 

 

농암종택 건물배치도

 

뒤돌아본 대문채

 

대문안 석상

 

사랑채

 

 

 

 

 

 

 

 

권씨부인이 지은 선반가(宣飯歌)는 자식인 농암이 승진하여 귀향하자 어머니가 매우 기뻐해 노래한 매우 소박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농암종택을 최초로 지은 이는 영천이씨 입향시조로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李軒)입니다. 그런데 사랑채 내부에 걸려 있는 아래사진의 현판 글씨 중 오른쪽 글자를 모르겠군요.

사랑채 내부의 글씨(?헌)

 

사랑채에서 본 대문채

 

 

 

 

 

사랑채 뒤에는 안채가 있고 안채 뒤쪽에는 사당이 있으며, 사랑채 앞에는 별채가 있는데, 안채 및 별채와 관련해서는 안내문이 없더군요. 별채 옆에는 긍구당이 있는데, 긍구당(肯構堂)은 농암종택의 별당으로서 입향시조인 이헌이 고려후기에 처음 지어 손님을 맞이하는 용도로 사용한 종택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긍구당이라는 이름은 농암이 중국 "시경"의 한 구절을 따온 것으로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훌륭한 업적들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래도록 이어 받으라”는 뜻이 담긴 말이랍니다. 농암은 이 집에서 태어나고 또 생을 마감했습니다.

안채

 

 

장독대 뒤의 사당

 

별당

 

별당에서 본 대문채

 

긍구당

 

 

 

 

 

 

 

 

 

별채 뒤쪽의 명농당(明農堂)은 농암이 41세 때인 1501년 고향에 지은 조그만 집으로 벽 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다고 합니다. 농암은 1542년 임금의 만류를 물리치고 모든 관직을 사직했습니다. 임금은 농암을 접견한 후 금서띠(金犀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했습니다. 이후 농암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읊은 노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 뿐이오 간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고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명농당에서 본 농암종택

 

 

 

 

 

▲ 분강서원

 

농암종택 바로 옆에는 분강서원이 있습니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소재 분강서원은 광해군 5년(1613) 지방유림의 공의로 농암 이현보(李賢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향현사(鄕賢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게 시초였습니다. 그 뒤 숙종 26년(1700) 서원으로 개편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 훼철된 것을 1967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4칸의 숭덕사(崇德祠), 8칸의 흥교당(興敎堂), 6칸의 극복재(克復齋), 6칸의 경서재(敬恕齋), 유도문(由道門), 12칸의 주소(廚所), 협문(夾門) 등이 있으며, 사우(祠宇)인 숭덕사에는 이현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서원의 정문인 유도문(由道門)을 들어섭니다. 정면에 분강서원이 있고 우측에는 동재인 극복재, 좌측에는 서재인 경서재가 있습니다. 동재와 서재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에 설치한 기숙사를 말합니다. 서원 우측에는 농암사당이 있는데, 농암의 위패(망자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와 영정을 모신 곳입니다. 서원 바로 좌측에는 한속정사(안채, 바깥채)가 있는데 살림집이어서 출입금지로 인해 출입문에서 사진만 찍었습니다.

 

유도문

 

분강서원

 

 

동재인 극복채

 

서재인 경서재

 

농암사당

 

 

한속정사(안채)

 

한속정사(바깥채)

 

분강서원 한속정사

 

 

 

 

 

▲ 농암신도비

 

분강서원 좌측에는 농암신도비가 있습니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에 세웠습니다. 이 신도비는 농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명종 20년(1566)에 세운 것입니다. 원래 농암의 무덤에 있던 것을 농암 유적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것입니다.

 

 

 

 

 

 

 

 

▲ 애일당, 강각, 농암각자

 

분강서원에서 낙동강변을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애일당입니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소재 애일당(愛日堂)은 조선전기 문신 이현보(1467~1555)가 건립한 팔작지붕 형태의 정자(정면 4칸, 측면 2칸)입니다. 조선 중종 28년(1533) 이현보(李賢輔)가 94세의 아버지 이흠(李欽)과 92세의 숙부, 82세의 외숙부 김집(金緝)을 중심으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하루하루를 즐겁게 소일할 수 있도록 경로당을 짓고, 당호를 애일당이라 하였습니다.

 

 

 

 

 

 

건물 내에는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그리고 이현보 등의 시문편액(詩文扁額)이 걸려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개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래는 도산면 분천리 산11-1번지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에 의한 수몰로 분천리 산11-17번지(안동선비순례길 2코스)로 이전되었다가 2004~2005년 “농암종택 복원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애일당이 가송리의 농암종택 내부로 이전하였습니다.

애일당 입구

 

 

애일당

 

 

 

 

 

 

강각(江閣)은 1512년 전후 애일당 아래 분강의 강가에 농암이 지은 집으로 당시 이곳에는 농암을 비롯해 퇴계 이황, 김안국, 이우, 이언적, 주세붕, 황준량 등 많은 명현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농암은 어부가를 지었는데 이는 퇴계의 도산십이곡과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도 영양을 미쳤습니다. 

 

 

 

 

 

농암 각자(刻字)는 농암이 지은 애일당의 원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바위에 새긴 글자입니다. 바위에 새긴 글자는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 8자로 “농암선생의 정자가 있던 옛자리”라는 뜻입니다. 후일 안동댐 건설로 애일당을 이건하면서 바위에 새긴 글씨를 분리해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바위를 담장 밑에 바로 붙였더라면 각자 바위 앞 여유 공간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텐데 너무 벼랑 앞쪽에 배치해 사진을 찍기가 어려운 게 옥의 티입니다.

 

농암 글자

 

선생 글자

 

정대 글자

 

구장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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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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