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소재 추사박물관은 조선후기의 실학자 겸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의 정수를 널리 알리기 개관한 박물관입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의 실학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한 문인으로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한 인물입니다. 과천시가 추사박물관을 세운 것은 과천은 추사가 말년에 4년간 이곳 과지초당에서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박물관 야외에는 과지초당이 있으며, 박물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은 추사의 학예 전시실, 2층은 추사의 생애에 관련자료 전시실, 1하 1층은 후지츠카 기증실과 기획전시실입니다.

 

 

 

 

 

관람은 박물관 2층 “추사의 생애실”부터 시작합니다. 김정희의 호는 추사, 완당, 예당, 노과 등이며, 1809년 연경에 가는 부사 김노경(추사의 부)을 따라 그곳에서 40일간 머물며 청나라 고증학을 접했습니다. 1819년 문과에 급제해 규장각 대교,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으며, 1840년부터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된 후 1851년부터 1년간 함경북도 북청에 유배되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추사는 과천 과지초당에서 4년간 머물다 별세했습니다.

과지초당

 

 

 

 

 

추사는 불과 8세 때 아들이 없는 큰 아버지(김노영)의 양자가 되었는데 이때 친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아버지를 기리는 마음과 동생들의 안부, 그리고 학문에 매진한다는 소식을 전함)가 지금도 남아 있어 그의 효심과 형제간 우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추사가 8세 때 생부에게 올린 편지

 

 

 

 

 

 

이곳에는 진흥왕 순수비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금석학(쇠붙이나 돌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를 연구하는 학문)을 배운 김정희의 업적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밝혀낸 것입니다. 그간 이 비석은 조선의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무학대사가 만든 비석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1400년 전에 한강 하류가 신라의 영토임을 알리는 순수비였음을 알아낸 것이 추사 김정희였습니다. 1816년 순수비의 발견은 우리의 고대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역사 속에서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산 비봉 소재 진흥왕 순수비(모형)

 

 

 

 

1817년에는 무장사아미타조상비를 발견했는데, 이는 신라 소성왕비가 남편의 명복을 빌고자 부처를 만들어 경주 무장사에 둔 과정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당시 무장사터를 방문한 추사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무장사비의 다른 한 조각을 발견하고 비의 측면에 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추사가 비석에 남긴 글의 탁본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가 54세 때인 1839년 필적으로 “송곳으로 철판을 꿰뚫는 힘으로 쓴 글씨”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굳센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옥산서원 현판

 

 

 

 

 

추사는 55세이던 1840년 정치적인 사건으로 모함을 받아 제주 서귀포 대정현에 유배되었는데, 9년간의 고단한 귀양살이 속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체인 추사체를 이루며 학문과 예술의 대한 열정을 불태웠으며, 그의 대표작인 세한도 및 일로향실 등이 유배시설의 작품입니다.

김정희 제주 유배지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또 다시 모함을 받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이 때 친한 후배 윤정현이 함경감사로 오게 되자 추사는 윤정현과 함께 황초령에서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를 원래의 자리인 진흥리로 옮기고 비석보호각을 세웠습니다. 이때 함경감사의 부탁으로 진흥북수고경(振興北狩古竟)이라는 현판을 썼습니다. 이는 “진흥왕이 북쪽을 순시한 옛 영토”라는 뜻이랍니다.

 

 

 

 

 

이번에는 추사최후의 필적을 살펴보겠습니다. 북청유배에서 돌아온 추사는 부친이 세운 과지초당에 머물며 여생을 보냈는데, 강남의 봉은사에 남아있는 판전(版殿)은 추사가 죽기 3일전 쓴 마지막 글씨입니다. 불교현판을 보관하는 곳을 대장각 또는 장경각이러고 하는데 봉은사의 경우 판전이라고 부릅니다. 위에 소개한 것 이외 추사와 관련된 자료를 일괄적으로 게재합니다.

과지초당

 

봉은사 판전 현판 글씨

 

 

 

 

 

 

 

 

 

 

 

 

1층 “추사의 학예실”은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주제별로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북학파의 영향으로 추사가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는 과정, 청나라학자들과의 활발한 교류, 조선금석학의 연구와 여러 계층과의 교유, 추사의 글씨에 관한 연구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추사가 벼루 10개, 붓 1천 자루를 사용했다는 대목은 정말 놀라울 지경입니다.

 

 

 

 

 

 

 

 

 

 

 

 

 

 

 

 

 

 

 

 

지하1층은 “후지츠카 기증실”입니다. 이는 추사 연구의 대가였던 일본인 후지츠카 지카기 교수가 평생 수집해 기증한 추사 관련 자료 전시실입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중국철학 교수로 추사관련 청 및 조선의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습니다. 그의 아들 아키나오는 선친에게 물려받은 자료의 기증을 원하는 동경대학 도서관의 요청을 뿌리치고, 2006년에서 과천 추사박물관에 총 1만 5,000여 점을 기증했습니다.

 

 

 

 

 

 

 

 

 

 

 

이 중 국보인 세한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세한도는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제자인 역관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입니다.

 

 

 

 

 

그림 끝에 작화 경위를 담은 추사의 발문이 있고 후일 이상적이 이 그림을 중국에 가져가 청대 16명사들의 찬시를 받아 왔으며,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의 찬문과 오세창·이시영의 배관기 등이 함께 붙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뒤 세한도는 김병선, 김준학, 민규식을 거쳐 후지츠카 박사가 다섯 번 째 소장자가 되었으며, 1944년 손재형이 후지츠카로부터 넘겨받아 고국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지하에는 체험실과 세미나실이 있어 방문객은 추사의 명품글씨를 직접 작성하거나 탁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추사박물관은 그간 명필서예가로만 알고 있던 추사의 생애와 깊은 학문 그리고 그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 글이 마음에 들면 공감하트(♡)를 눌러주세요!

로그인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pennpen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