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훈이 대성도가를 떠난다고 한다.
지금 대성참도가를 일으켜 세우기에 열 손이 부족한 실정인데도 홍기훈(천정명 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이제야 나타났다. 그는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닦달했다.
"뭐하는 사람이야? 이 딴 식으로 남의 회사에서 월급 받을 생각을 해?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이냐고? 이 딴 직원 필요 없어! 당장 사표 써!"
그가 입을 열였다.
"우리 술 만들 수 있다. 은조(문근영 분)야!'
술을 만들 수 있다는 말에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일본에서 취소한 동결건조라인은 제약회사 유산균제조라인과 똑 같은 거야! 내가 그런 곳 열 군데쯤 돌아다녔는데 한군데서 연락이 왔어. 그 조건이 까다롭긴 해. 첫째, 일단 비용이 만만치 않아. 손익계산은 내가 지금부터 자세히 따져볼게! 그 비용을 치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지, 절대 대성참도가에 해를 끼치지 않은 방법을 찾아볼 거야! 만약 비용출혈이 너무 크면 그 사람들 다시 만나 협상해 볼 거야."
"둘째는 뭐야?"
"네가 발명한 효묘를 의학적 원료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데.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일정시간이 지난 후에 네가 연구에 협조해야 한다는 거야! 물론 이건 극비사항이고."
"셋째도 있어?"
"여름 휴가철 지나고 부터 내가 그 회사로 옮기는 거! 내가 만난 그 제약회사 담당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같은 학교 다니던 선배야! 내가 필요하데. 그러기로 했어! 그러려면 지금 대성 참도가를 일으켜 놔야해! 누가 건드려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게 세워놔야 해."
"그러기로 했다고?"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
"응" 그가 대답했다.
"여기서 떠난다고?"
"그래!"
"대성 참도가를 떠난다고 약속을 했다고?"
"그래! 그랬어! 떠날 때까지 목숨 바쳐 일할게! 믿어 줘!"
(2) 은조, 또 정우에게 진심을 털어놓다.
그가 이제 떠난다고 한다. 마음이 울적하다. 몸을 움직이기도 싫다.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을 따름이다. 마침 정우(택연 분)가 들어왔다. 멍청하게 앉아 있는 나를 본 정우가 묻는다.
"한 시간도 더 넘었다. 언제까지 이럴거고, 너!"
"아주 오래 전부터 아침에 눈을 떠도 하나도 재미있지가 않았어! 어떤 남자 집에서 눈을 뜨거나, 여관방에서 눈을 뜨거나 둘 중 하나였지. 내가 제일 많이 들은 소리는 엄마가 악다구니 쓰는 소리, 악다구니 쓰는 엄마한테 남자들이 하는 음성(?), 살림살이 깨지는 소리, 그런 거 였어. 어느 날 부턴가 그런 소리가 안 들렸어. 잠깐 또 그러다 듣기 싫은 소리 들어야겠지. 어차피 깨질 평화니까 믿지도 않았어. 믿었다 배신당하면 나만 아프니까.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도 엄마 악다구니 쓰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거야. 거짓말처럼. 그리고 또 그기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재미있게 까지 했어. 밤에 빨리 잠을 자고 싶었어. 자고 일어나야 아침이니까. 또 자고 일어나 아침이 되야 또 그 사람하고 똑 같이 하루를 시작하니까.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기에 기분 좋은 사람이 있었어. 난 감히 뭘 많이 바라지도 않았어. 내가 어딜 갔다 오더라도 그 사람이 있으면 그걸로 됐었어. 잠깐 안 보이더라도 금새 보이면 백만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웠어. 난 그걸로 됐었어. (그는 나에게 만년필을 주며 "손에 쥘 때마다 날 생각해라"고 말했지.) 그런데 그게 뭘 그렇게 많이 바란 거리고 보지도 못하게 가버리더라. 그런데 또 간데. 또 가겠데. 거지같다. 사는 게."
나의 넉두리를 잠자코 듣고 있던 정우가 말했다.
"내가 못 가게 할까? 다리몽둥이라도 부러뜨릴까?"
나는 비로소 정우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그래 줄 수 있어? 그럴 수 있음 그래 볼래?"
그동안 서 있던 정우가 내 앞에 앉고는 손으로 내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울지 마라."
나는 정신을 수습했다.
"잘 됐네, 뭐. 이번에 가면 다시는 오지 않겠지. 안 오면 다시 가지도 않겠지. 잘 됐다. 정말 잘 됐다. 정우야."
(3) 기훈의 선배가 왜 하필 여자인가
정우와 헤어졌다. 술도가로 가니 기훈이 어떤 젊은 여자와 담소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평소 기훈의 웃음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참으로 이상하다.
팔짱을 낀 그녀를 배웅한 기훈이 탁주제조비용 산출자료를 내밀었다. 여러 설명을 덧붙인다.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아니한다. 그는 그 제약회사 선배가 다녀갔다고 한다. 왜 선배가 하필 여자인가. 내가 반문했다.
"그쪽을 스카우트한 선배 말이지?"
"그래, 그 선배."
"참 잘 웃더군."
"그래. 두 마디 하면 한 마디는 우스개 소리 하는 사람이야. 아주 유쾌한 사람이지."
"잘도 따라 웃더군."
"그래, 그 사람 주변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웃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훈에게 말했다.
"더 좋은 데로 옮기게 돼서 잘됐다 싶지? 어차피 처음부터 그런 커다란 회사의 마케팅부서 쪽으로 특채가 되었어야 할 사람 아니야? 효선이 아버지 그렇게 되고 나서 차마 나와 효선이 앞에서 떠날 핑계가 없었던 거잖아. 안 그래? 이 일이 전화위복이라고 생각되지? 축하해. 정말 잘 됐어."
"그래. 고맙다."
(4) 기훈이 홍주가의 아들이라니
공장의 생산라인이잘 돌아가고 있다. 이번 위기를 잘 극복해야 할텐데. 이 때 잡지사의 동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난번 일본 탁주사기사건이 홍주가에서 개입을 했단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상한 것은 기훈이가 홍주가의 막내아들이라면서 나더러 이 일을 알고 있었느냐고 묻는다. 이게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지난번 그 일을 전부 기훈이가 저질렀단 말인가.
책상에 앉아 있는데 좀처럼 웃지 않는 기훈이 만면에 웃을 띠며 나타났다. 손에 든 잡지책을 펼쳐 보이며 "은조야!'하고 불렀다. 잡지의 표지에는 "싸카로마이시스 대성으로 부활한 사람"이라는 제목과 함께 아저씨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다.
기훈이 말한다.
"이제 다 됐어. 다 끝났어, 은조야!"
기훈의 저 웃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기훈이가 홍주가의 아들이라니. 내가 지금까지 허깨비를 마음에 품고 있었단 말인가! 대성 참도가를 살려야 한다는 그 말의 진의가 무엇인가. 크게 키워서 집어삼키겠다는 말인가. 제약회사로 가겠다는 게 결국 이것 때문인가. 인간이 왜 이리 무서운가. 앞으로 난 어찌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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