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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서울공예박물관(2021. 7월 개관)은 서울시에서 강남으로 이전한 (구)풍문여고 건물 5개 동을 리모델링하여 건축한 한국 최초의 공립 공예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은 전통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시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2만여 점의 공예품과 공예자료를 수집.보유하고 있으며 안내동과 관리동, 전시동(3개) 및 교육동(어린이박물관 입주)이 있습니다.

 

 

 

 

 

 

 

서울공예박물관 터는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집, 순종의 가례를 위해 건축된 안국동별궁 등 왕가의 저택으로 사용되거나 왕실 가례와 관련된 장소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며, 수공예품을 제작하여 관에 납품하던 조선의 장인 경공장(京工匠)들이 거주했던 종로구의 중심 지역입니다.

 

현재 전시1동 2층 상설전시실은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 전시2동 2층 상설전시실은 “자연에서 공예로”, 전시3동 2층 상설전시실은 “자수, 꽃이 피다”, 전시3동 3층 상설전시실은 “보자기, 일상을 감싸다”전시가 열리고 있으며, 교육동 2-3층은 어린이박물관(공예마을)이며, 교육동 옥상은 전망대입니다.

 

 

 

 

 

 

 

박물관을 관람하려면 먼저 안내동으로 가야합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기념품점이 있고 로비에 있는 각종 의자와 방석 등도 작품입니다.

전시1동

 

안내동(좌측)과 전시3동(우측)

 

안내동 입구

 

박물관 가게

 

작품명 ; 시간의 흐름(붉은색 조형물)

 

 

 

 

 

도서실

 

 

 

 

 

 

I.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

 

로비에서 엘리베이터 또는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오르면 “장인, 세상을 이롭세 하다”전시회가 펼쳐집니다. 조선은 개국 초기에 국가와 국가, 국가와 개인, 개인과 개인 간의 질서로 작용하는 오례(五禮)를 법으로 정비하고, 그 실현을 위해 숙련된 장인들을 중앙과 지방 관부에 속하도록 해 외교, 군사, 왕실의례와 일상생활 등에서 요구되는 물품들을 제작했습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중앙 및 지방관부에 속한 장인의 수가 6,5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공장제(工匠制)는 16~17세기 조선이 일본 및 중국과의 전쟁을 겪으며 느슨해졌으며, 19세기 말에 이르면 해체되었지만 장인들은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기술과 도구들을 개량하고, 새로운 양식과 문양, 유행을 만들어 사람들의 일상생활 밑바탕에는 무수히 많은 장인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장인이 새긴 왕실의 특별한 이름

 

조선시대에는 왕비.왕세자.왕세손 등을 책봉하거나 왕.왕비.세자.후궁 등에게 특별한 이름(존호나 시호)을 올릴 때 그 사실이 담긴 기록물인 어책(御冊)이 제작되었는데, 왕과 왕비의 경우는 옥(玉)으로 제작되어 옥책(玉冊), 왕세자 및 후궁의 경우는 대나무로 만들어져 죽책(竹冊)이라고 했습니다. 어책은 그 시대 최고의 기량을 가진 남녀 장인들 100명 이상이 최고의 재료를 국가로부터 제공받아 재료의 가공부터 마지막 기물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긴밀한 협업을 통해 제작하는 최고 수준의 왕실 공예품이기도 했지요.

 

 

 

 

 

 

▲ 견양(見樣), 왕실 공예의 표본

 

견양(見樣)이란 국가의례나 왕실생활 물품제작을 위해 규정된 치수와 특정한 양식을 그림이나 견본 등의 형태로 제시한 것으로서 제작되는 품목들의 일정 수준의 품질과 예술성을 담보하는 주요 수단이었습니다. 조선은 예서나 의궤 등 국가 기록물에 다양한 물품들의 견양을 그림 형식으로 실었고, 경공장 등 장인은 이를 기본으로 하여 물품을 제작했습니다.

 

 

 

 

 

 

 

 

 

 

 

 

 

 

 

 

 

 

 

 

 

▲ 규방과 사대부들의 멋

 

유교가 일상을 지배하던 조선에서는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를 정하고, 가구·도자기·복식 등 다양한 소재의 공예 장식에 대해 규제를 했는데, 사대부들은 여러 제한 속에서도 은근한 멋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집의 규모나 각자의 취향을 반영해 다양한 물품들을 주문 제작해 사용했으며 민간에서는 고급 왕실기물들을 모방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 일상의 공예로 나아가다

 

임진왜란 이후 사회 질서가 혼란해졌으나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농업 생산성 확대와 상공업의 발달로 민간에서도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계층이 나타나자 관청에 속하지 않고 활동하는 장인(私匠)이 등장해 사대부 이상 계층에 한정되던 고급품의 소비가 민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II. 공예, 근대의 문을 열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밀려드는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는데,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으로 선포하고, 옛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강건한 나라를 만들고자 함에 따라 전통방식의 수공예가 쇠퇴했고 오히려 공예가 산업기술로 인식되었습니다.

 

 

▲ 『하재일기』에 기록된 공예

 

『하재일기(荷齋日記)』는 조선 왕실의 도자기를 제작하던 분원공소(分院貢所)의 장인이자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池圭植)이 1891년부터 1911년까지 약 20년 7개월(7,498일) 동안 쓴 일기로 조선이 근대 사회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 대한제국의 공예

 

고종황제는 자주적인 강대국을 만들기 위해 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견학하게 하였는데,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독립관을 설치하여 도자기, 나전칠기, 비단, 금속공예품 등을 출품하였습니다. 특히 파리박람회는 산업기술을 도입하고 근대화를 촉진하는 수단으로서의 공예를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전통공예의 가치를 재인식함으로써 전통공예를 부흥시키고 공예의 산업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III. 공예, 시대를 비추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전통 공예가 위축되고 산업 공예가 일상에 파고들었는데, 공예품이 관광상품이나 기념품으로 주목받으면서 자본가들이 공예품 제작과 판매에 참여하였고, 이렇게 생산된 공예품들은 백화점이나 공예 상점을 통해 유통되었습니다.

 

한편 조선미술전람회를 비롯한 각종 전시회에서 공예는 미술의 한 분야로 편입되고, 선진 교육을 경험한 공예가들이 이 전시회를 통해 배출되어 미술로서의 공예의 지평을 열었지요.20세기 전반의 공예품은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쇠퇴해가는 전통 공예품의 대중적 인기를 높이는 데 목표를 두고 만들어졌습니다.

 

 

 

 

 

 

 

 

 

 

 

 

☞ 위 설명은 서울공예박물관 홈페이지 자료(전시회)를 발췌해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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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n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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